(성화장로교회)
얼마전 수술을 했는데 내 몸을 직접 만지는 것은 의사의 손이 아니라 로봇이었다. 철저한 데이터에 의해 수술부위를 파악하고, 조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정확한 수술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한다. 물론 의사는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이끌고 점검하는 컨트롤 타워에서 로봇이라는 기계를 통해서 수술한 것이지만 허준이나 그 분야의 권위자로 인정받는 사람 손이 아니라 기계가 일을 했다.
시대는 정말 많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매년 개최되는 다양한 쇼들은 그 변화를 열심히 소개하지만 그 모든 변화를 쫓아가기에도 우리는 숨이 차다. 작년 7월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CES 2020’쇼에서는 우븐시티(Woven City)라는 미래도시 설계 계획이 소개되었는데, 한마디로 전화기가 스마트폰 시대로 순식간에 변신하듯이 우븐시티는 미래의 도시인 ‘스마트시티(smart city)’계획이 발표된 것이다. 우븐시티라는 도시 이름은 격자 모양으로 직물을 엮는다는 뜻을 가진 ‘weave’에서 유래한 말로 그야말로 인공지능(AI)이 운영하고 관리하는 스마트 도시를 건설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런가하면 밀레니얼시대가 이동 중에 짧고 간단한 영상을 스마트폰으로 보는 것에 착안한 10분 내외의 짧은 영상콘텐츠 8,500개를 구성해 가로, 세로 맞춤형 영상이 끊임없이 플레이되는 ‘턴스타일 기술’이 관심을 끌고 있다. Z세대가 열광하는 짧은 콘텐츠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 기술영상에 의한 플랫폼을 ‘퀴비(Quibi’)’라고 한다. 엔터테인먼트의 혁명이라고 불리는 ‘퀴비’는 한입거리라고 번역할 수 있는 Ouick bite의 줄임말로 7-10분 길이의 영화부터 패션, 요리, 뷰티 등 뉴스, 스포츠, 일상을 소재로 한 영상 등을 수시로 업데이트해주는 새로운 미디어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미래는 이렇게 모든 분야가 변화될 것이다. 올해 한국의 그룹 총수들의 신년사를 분석했더니 ‘미래, 문화, 공진화, 디지털’ 등의 단어가 사용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리고 올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분석해보았더니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가 ‘미래’라는 단어로 밝혀졌다.
미래, 그 시간은 과연 오는가? 라는 철학적인 질문에 수학은 숫자를 계산해가며 반드시 그 시간을 온다고 주장하고 과학이나 천문학은 우주의 변화를 제시하며 미래를 말하고, 시인은 감성과 감정의 흐름을 따라 낭만미래를 말하곤 한다. 그러나 미래의 시간은 안타깝게도 벌써 우리에게 깊이 들어와 있다.
동성애 문제도 그렇고, 낙태문제도 그렇고, 윤리 기준 문제도 모두 다 사실은 현재 닥친 문제이다. 그러나 조금만 뒤를 돌아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그 자리에서 바라보던 미래가 이미 우리 안에 가득하게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기독교신앙도 사실, 현실보다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과학의 변화를 바라보며 과학의 위대성과 인간의 연약함을 깨달음으로 갖게 된 두려움의 감정을 함께 갖고 있다. 몸 안으로 기계가 들어와 언젠가 입력해놓은 데이터에 따라 몸 구석구석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잘라내기도 하는 로봇 수술경험은 또 새로운 것이었다.
아직은 의사가 곁에서 로봇의 움직임을 도와주고 있었지만, 미래 공상과학은 앞으로 의사가 아예 없이 기계가 혼자서 모든 과정을 책임지는 로봇닥터의 시대가 눈앞에 와있는 것을 체험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변화되어가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애플사는 구글이나 페이스북과는 차별을 선언하며 ‘프라이버시(privacy)를 무기로 들고 나왔다. 즉 페이스북이나 구글로 로그인할 경우 사용자의 이름, 성별 같은 개인정보가 유출되는 것과 차별을 두어서 애플은 이와 같은 로그인하는 것을 아예 차단한 것이다.
기독교신앙도 미래를 말한다. 아니 미래를 넘어서 영원을 말한다. 그런데 놀랄만한 이슈와 제품들이 소개되는 쇼와는 달리 다가올 미래에 대한 아무런 흥미도 주지 못하는 종교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표어도 있고, 구호도 있고, 계획도 있지만 과학의 미래보다 넓고 깊고 다양하게 펼쳐질 영원의 세계에 대해 흥미를 주지 못하는 기독교, 그러니 기독교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 아닐 수 없다는 진단을 하게 된다.
병원에 누워 신기하고도 놀랄만한 의료기술과 장비를 경험하면서, 영적 발전이 없는 기독교신앙, 소망의 기대를 주지 못하는 기독교신앙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하는가라는 걱정거리를 하나 더 안고 퇴원을 했다. 현실로 다가온 기독교신앙의 위기를 여기서 찾아본다. 그토록 확실하게 보여준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린 자리가 위기의 시작이었음을....
위기(危機), 위험과 기회 두 단어의 조합 속에서 우리가 이제라도 붙잡을 단어는 기회(機會)임을 깨닫는다.
02.15.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