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장로교회)
개인의 관점(觀點)과 해석(解釋)의 차이가 관계를 무겁게 하고, 전쟁(戰爭)과 정쟁(政爭)은 온 나라를 무겁게 덮어버린다. 소설가 김훈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글의 말미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의술도 모두 가벼움으로 돌아가자. 뼛가루를 들여다보면 다 알 수 있다. 이 가벼움으로 삶의 무거움을 버티어 낼 수 있다. 결국은 가볍다.” 삶은 무겁지만 죽음의 자리는 뼛가루처럼 가벼운 것이라는 소설가의 진단이다. 그러나 뼛가루의 가벼움만으로 삶을 정의할 수 있을까?
어느 시대이든 한 부류가 상대편의 생각과 충돌하면서 무거운 먹구름을 몰아오곤 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역사는 단순한 정반합의 논리로 진행되기보다는 충돌로 끝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조선시대 노론과 소론, 남인과 북인이 그랬고 해방 후 한국의 우파와 좌파, 그리고 경영주와 노동자, 가진 자와 못가진 자들은 서로를 이해하기보다는 마주보고 달려가 결국엔 충돌해버릴 수밖에 없는 위기의 질주를 해왔다. 그 질주는 시대변천에 따라 또 새로운 모습으로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세상의 이야기는 언제나 무겁다.
밀란 쿤테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가볍게 집어들고 읽기시작하다 머리를 무겁게 짓누르는 무게 때문에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체코가 소련에 침공당한 암울한 시절을 배경으로 이 소설에 등장시킨 네 명의 주인공은 무거운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무엇엔가 삶이 막혀버릴 때 이들은 섹스중독을 선택한 토마시, 남편의 그와 같은 모습에 자기도 불륜을 선택하는 그의 부인 테레자, 엉망이 되어버린 나라의 현실을 외면하고 미학적 가치를 추구하는 현실무시의 캐릭터인 사비나 그리고 유망한 대학교수인 프란츠는 국민의 정당한 요구행진에 앞장서지만 아무 것도 개선되지 않자 침묵을 선택한다.
무거운 시대적 삶의 주제에 나름대로 접근해보려다 결국엔 가벼움을 선택한다는 줄거리의 이 소설도 결코 무거운 삶을 가볍게 해주지 못하고 오히려 도피하게 하거나 무관심하게 할 뿐이다. 바다 건너오는 한국의 소식을 외면할 수만은 없고, 발을 딛고 사는 미국 또한 외면할 수만은 없다. 이민자인 우리는 그래서 오히려 두 개의 무거운 짐을 이고 살아가는 버거운 위치에 서있는 것이다. 여기서 들려오는 말도 저기서 들려오는 말도 가벼운 이야기들이 아니다, 무겁다. 잔뜩 찌푸린 하늘처럼 무겁다. 그래서 이 시대는 자유분방해지거나 홀로 고고해지거나 내 마음 가는대로 살겠다고 선언해버리고 있다
한국에서는 정의(justice)를 부르짖는 두 부류가 결국엔 “우리가 더 모였다”는 크기(size)로 ‘바르다(義)’는 판단을 주장하고, 미국도 위장된 이기주의로 자신의 힘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 교회들조차 ‘큰 것, 많은 것이 바른 것’이라는 헛된 주장을 펼쳐내고 있다. 세상은 “결국 너희들의 경전, 너희 신의 말을 믿으라는 것이냐?”고 반문하겠지만 수많은 인파의 숫자로 의(義)를 주장하는 백만, 이백만의 인파들 중에 누가 과연 벳세다 광야의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에 담긴 영생의 맛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질문해보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충돌은 이기심과 자만심에서 나온 결과이다. 김훈은 화장터의 뼛가루가 하늘로 뿌려지는 자유함의 가벼움을 통해 무거운 삶의 이야기를 벗어낼 방법을 말했다면, 오늘날 교회는 이 세상에 어떤 방법과 길을 말해주어야 할 것인가?
절대기준을 가져야할 교회도 상대평가를 선택함으로써 결국 자기중심의 성경해석으로 상대방과 세상을 판단하고 있다. 구약 선지자들의 의로운 외침을 가지고 이 시대를 꾸짖기도 하고, 억울하게 고난의 늪에 빠진 상황에서 결국엔 의로움을 인정받은 욥을 들추어내어 나의 의를 외치기도 하고 반면에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앞에서도 어린양처럼 침묵하신 예수님을 비유하며 교회는 무조건 잠잠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성경은 인간이 가장 합리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라고 자부한다 할지라도 결국 상대적 평가기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창조주 앞에 서지 않는 한 상대방과 충돌할 수밖에 없고, 결국엔 자기 자신의 죽음과 충돌하고 끝나게 될 것을 이미 말해주었다. 무겁다. 한국의 상황도 무겁고, 미국과 전 세계의 상황이 무겁다. 갈수록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무게에 짓눌려버리는 세상이다.
독자들은 이 무거운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스도인이 보는 세상, 즉 믿음의 시각은 “현재 이 세상의 사실들이 일의 결국이 아니라 모든 일의 결국은 그 밖, 너머에 있다는 것을 보는 시각이다”라고 말한 비슈켄슈타인의 고백을 기억하며 전도서의 말씀을 되뇌어본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전12:13-14).
10/12/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