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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책 주심에 감사!

민경엽 목사 (오렌지 카운티 나침반교회)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태풍 몇 개/저 안에 천둥 몇 개/저 안에 벼락 몇 개/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저 안에 땡볕 두어 달/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장석주 <대추 한 알> 시간은 무심히 흐르고 계절은 저절로 바뀌지만 사람의 일에는 저절로 되는 일이란 없다. 무수한 세월 노력하고, 참고, 견디어야 하리라. 매년 맞이하는 종교개혁의 계절이지만 올해는 500주년이란 것 때문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지고 알아보다가 오늘 우리가 당연시하는 것들을 쟁취하기 위해 과거에 어떤 노력, 어떤 희생, 어떤 아픔이 있었는지를 볼 수 있었다. 목사의 집이니까 내게는 이십 권 남짓한 성경책이 있다. 한글로 된 성경책만도 얼추 보니 거의 열권에 이른다. 종류별로 다 있다. 스마트폰에도 성경이 깔려 있으니 식구 수만큼 더 있다. 같은 종류의 지금은 보지 않는 옛날 성경만도 여럿이니 이 정도면 지천에 깔린 게 성경이랄 수 있다. 웬만큼 열심 있는 성도라면 성경책은 한 사람당 두어 권씩 없는 집이 없으리라. 이 성경 한 권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세상이 되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종교개혁가들의 목숨이 사라졌는가! 또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종류와 부수의 성경책을 인쇄하고 있는 우리나라 성도들에게 성경을 들여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수고하였는가!

14세기 영국의 존 위클리프는 성경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보통 사람들에게 성경을 직접 읽고 연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누구라도 겸손하고 사랑이 있는 사람이라면 성경을 올바르고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농부나 장인이라도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성경 번역이 법으로 엄격히 금지된 상황에서 옥스퍼드의 학자들과 함께 라틴어로 된 불가타 성경을 1382년 영어로 번역하였다. 이에 분노한 로마 교황청은 그가 죽은 지 44년 뒤에 그를 이단으로 판결하고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하고 그의 뼈를 태운 뒤 강물에 쏟아 붓는 만행을 저질렀다.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아 성경을 번역한 사람이 16세기 초에 살았던 윌리암 틴데일이다. 그는 7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는데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기 위해 유럽을 떠돌며 비밀리에 작업을 했고 기존에 없던 단어들도 새롭게 만들었다. 그는 라틴어가 아닌 히브리어, 헬라어 원전을 직접 번역하였다. 킹제임스 성경 영어판의 70% 정도가 그의 번역에 근거하였다. 그는 “주여, 영국 왕의 눈을 뜨게 하소서”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화형을 당하였다. 이들의 희생으로 거대한 마그마가 끌어올라 종교개혁이라는 화산이 폭발하여 세상이 뒤집어졌다.

대동강변에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의 이야기를 듣고 조선이라는 나라에 관심을 가진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소속의 존 로스 선교사는 1878년 마가복음을 번역한다. 이는 우리말로 된 최초의 성경이다. 그는 1876년 중국에서 한글을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헤매다가 청나라와 한약재를 무역하며 한문과 만주어에 능통한 지식인 이응찬과 연결되었다. 당시 서양인을 돕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기에 다른 사람들이 보는 데서는 절대로 아는 척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달아 아직 믿지도 않는 상태에서 마가복음을 번역하였다. 그런데 어떤 불량들이 이 사실을 알고는 협박하며 돈을 뜯어서 그는 도망치고 말았다. 그러다가 1879년에 다시 로스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영접하고 조선인으로서는 세 번째로 세례를 받았다. 이 외에도 당시 로스 선교사를 도와주며 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성경번역을 도와준 이들이 백홍준, 서상륜, 김청송과 같은 이들이다. 그들이야말로 한국 초대교회사에 별같이 빛나는 존재들이다.

한국에 천주교는 개신교보다 100여 년 전에 들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세가 개신교의 1/3수준인 이유 중 하나가 성경을 보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연세대학교 백낙준 교수는 천주교회에 대해서 “1784년 이승훈이 교회를 창설한 이래 1866년까지 82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지만 그동안 쪽복음서 한 권이나 성경의 어느 한 부분도 번역하려 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개신교에서는 1885년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가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로 입국할 당시 이미 평안도 의주 지역에 100여 명(백홍준 전도), 서울 지역 300여 명(서상륜 전도)의 세례 지원자가 있었고, 만주 집안 지역에는 한인교회(김청송 전도)가 존재했었다. 이런 놀라운 일이 가능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성경이 번역되었고, 그 성경이 쪽복음 형태로라도 팔렸고, 그런 성경을 읽은 사람들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과거사가 엄존하는데 오늘 한국교회에는 성경문맹 때문에 제 2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한다는 소리가 드높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성경을 마음대로 선택해서 소유할 수 있고, 읽을 수 있는 자유를 주신 것을 감사하며 이 소중한 유산을 흘러 떠내려 보내지 않도록 더욱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집중할 것을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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