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여름이 되면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교회의 같은 반 친구들과 함께 전도여행으로 시골에 가서 여름성경학교를 해주던 기억이 난다. 그 바람을 불어넣어준 것은 주일학교교사였다. 친구들은 의기투합하여 일을 해보자고 나섰다. 어린 것들이 뭘 안다고 그런 것을 하느냐고 탐탁지 않게 여기던 교회 어른들의 눈치를 피해가면서 경비를 마련했고 교회당에서 여러 날 날밤을 새워가면서 준비한 끝에 찾아간 그해 여름성경학교는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커다란 북을 가슴에 안고 둥둥거리며 마을 한 바퀴를 도니 아이들이 줄줄이 따라 나왔다. 우리 스스로 생각해도 성경 지식이 너무 짧았지만 어린이들에게 아는 만큼 그러나 열정을 가득 담아 가르쳤다. 어설픈 촌극도 했는데 별 이야기도 아닌데 아이들은 웃고 즐거워하고 감동했다. 시골 교회의 여 집사들이 다 함께 나와서 일행에게 밥을 해주었고 식욕이 왕성했던 우리들은 무지막지하게 많이 먹어 함께 갔던 교사가 눈치를 볼 정도였지만 우린 그저 신났고 즐거울 뿐이었다. 그랬던 성경학교는 다음 해에도 이어졌다. 고3때만 쉬고 대학생이 된 다음에 해마다 이어졌고 군에 입대하는 친구들이 생겨서 그만두게 되었지만 그런 전도여행이야말로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준 일대 사건들이었다.
그런 전도여행이 신학원에 들어가서 계속 이어졌다. 함께 신학교 앞에서 자취생활을 하던 8명이 비전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한 전도사가 자기의 꿈은 낙도 선교라는 말에 감동을 받아 우리가 그를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겼다. 우선 낙도를 찾아서 전도여행을 가기로 하였다. 한국의 땅끝이라는 마을에서 배를 타고 30분, 그렇게 낯설고 물선 곳에 우리는 갔다. 오전에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성경학교를 하지만 낮에는 노방전도와 축호전도를 다니고 저녁에는 마을 주민들을 모아서 전도집회를 하였다. 전하는 말씀들이라야 전도사들의 서투른 복음이었지만 분위기는 뜨거웠고 설교 후에는 다수의 결신자들이 있었다. 몇 년 후 교회가 없는, 그러나 가장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지역에 낙도 선교를 처음 말했던 그 전도사는 교회를 세웠고 거기서 신혼의 삶을 살았다. 그렇게 복음은 전해져서 교회가 세워졌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었다. 돌아보니 교회와 신학교에서 우리가 이렇게 전도팀을 꾸려서 나갔던 것이 70년대 말부터 80년대 말까지였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교회의 부흥기와 맞물려 있었다.
이런 나의 추억들을 더욱 진하게 떠올리는 경험을 캄보디아에서 하였다. 수도 프놈펜의 젊은이 중심의 교회 주일예배가 마쳐진 후 한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현지인 전도사의 인도를 따라 2시간이나 걸려 품꼬라는 시골지역에 들어갔다. 빗물을 받아먹을 정도로 낙후한 지역이라 한국의 어떤 교회가 우물을 설치해준 것이 시발점이 되어 교회가 시작되었지만 아직은 어린이들만 모인다는 설명을 들었다. 찬송을 시작하자 어디선지 순식간에 2백 명 가까운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아이들은 초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신발이 없는 아이들이 여럿이었고 개중에는 아예 벌거숭이로 온 아이들도 있었다. 빗물을 받아놓은 항아리에서 주저 없이 물을 마시기도 하였다. 아이들은 저마다 신바람이 나서 찬송을 부르며 율동을 하였다. 동네 어른들은 주변에 둘러앉아 아이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즐거워하였다. 아이들은 너나없이 우리 선교팀에서 가져간 학용품을 받아들고는 가슴에 꼭 껴안고 고마워했다. 그 아이들의 눈빛에서 나는 캄보디아와 캄보디아교회의 미래와 희망을 보았다. 그리고 함께 간 팀원들 역시 공감하며 자신들의 비전트립에 그동안 들였던 수고에 대한 보람을 깨달았다. 그날 우리는 뜨겁고 진실하게 캄보디아를 축복하며 우리가 해야 할 사역의 향방을 가늠하게 되었다.
나의 이런 체험은 침체기에 놓여있는 한국교회와 이민교회들이 회복할 사역의 작은 한 지류에 해당할 뿐이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지금 우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뭐라도 해야 할 상황이다. 주님은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는 지상명령을 주셨다. 그 지상명령의 첫 구절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로 시작한다(마28:19). 심정적으로도 가고, 지리상으로도 가고, 물질적으로도 가고, 젊은이도 가고, 노인도 가고, 남자도 여자도 가야 모든 일은 시작이 된다. 우리가 가야 할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가야만 우리가 살아남기 때문이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배타적인 선민의식으로 자신들의 축복을 다른 열방으로 흘려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했다. 우리는 복음을 듣기 위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여야 하지만 우리의 축복을 깨달은 다음에는 그 기쁜 소식을 아는 만큼, 들은 만큼, 깨달은 만큼, 각자가 할 수 있는 만큼 전하기 위해 흩어져야 한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롬10:15).
danielkmin@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