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엽 목사 (오렌지 카운티 나침반교회)
어린 시절 가장 좋아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권투였다. 왠지 그 작은 사각 링에 들어가서 싸우는 선수들의 치열한 몸부림이 마음에 와 닿았다. 권투 선수들은 대개 가난했기 때문일까. ‘헝그리 복서’라는 말도 있을 정도였다. 일단 한번 시작하면 3분 종료 타종이 울릴 때까지 싸워서 이기든지 지든지 결판을 내야 하는 그 냉혹한 현실에 몸서리를 치는 만큼 스릴이 느껴졌다. 사각 링이 무서운 것은 도망가려고 해야 도망갈 수 없는 인생과 닮았기 때문이다. 때리든지 맞든지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1977년 11월에 파나마시티에서 열렸던 홍수환과 카라스키야의 WBC 챔피언 쟁탈전이었다. 홍수환은 2회 때 4번이나 다운을 당하고도 3회에 KO승을 거두어 4전5기의 신화를 이룩했다. 카라스키야의 강펀치를 맞고 쓰러진 홍수환이 정신을 가다듬은 다음에는 언제 두들겨 맞은 선수냐 싶게 불도저같이 펀치를 몰아붙였고 3회 초반에 모두의 예상을 깨고 당당하게 승리했다. 그리고 한국에 계신 어머니에게 한 마디 하라는 아나운서의 말에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이 한 마디에 대한민국 국민 전체는 열광했던 기억이 새롭다. 홍수환은 맷집이 강한 선수였다. 강한 맷집은 강한 체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불굴의 정신력으로 인한 것이다. 아마도 그때 우리들에게 있는 지독한 가난을 몰아내고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는 투지로 불타는 산업화의 도상에 있었기 때문에 홍수환의 승리가 더 마음에 와 닿았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어떤 목사의 어머니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셔서 장례식에 다녀왔다. 조촐하게 치러진 장례식이었지만 많은 감동이 있었다. 향년 92세. 대부분의 그 연세의 어르신들이 질곡 많은 삶을 살았던 것처럼 그 어머니 역시 참 어려움이 많았다. 남편이 사업에 계속 실패하여 강원도 어느 화전민촌에서 오두막을 만들어 살았는데 무허가 단속반에게 행패를 당한 것부터 시작하여 그녀의 인생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 6남매를 잘 키워냈고 무엇보다 평생을 신앙심으로 살았다. 소천하기 직전에는 마지막으로 다니던 교회에 휠체어에 의지해서 나가서는 “나 먼저 천국 갈 테니 뒤따라오세요”라고 보는 이들마다 인사하고는 그 다음 주에 부르심을 받았다. 막내 사위가 조사를 맡아했는데 불교신자였던 자기를 사랑과 권면으로 대해 주시는 장모로 인해 신앙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간증 같은 회고 앞에서 조문객들은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인사말씀에서 아들 목사는 자신의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남긴 유산은 “맷집을 키워준 것과 인생에 책임감을 가지는 것”이었다는 의미 깊은 이야기를 했다. “어머님은 나의 맷집을 키워주셨다!”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 말을 곱씹었다. 계속 얻어맞는 가운데서도 끝까지 지지 않고 살아남아 승리하게 한 것이 홍수환의 맷집이었다면 그 목사의 삶 속에서 계속 되는 시련의 매를 맞으면서도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그의 어머니가 보여준 단단함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어떤 삶의 우여곡절을 겪었는지 조금은 아는 나로서는 그 어머니가 키워준 맷집 때문에 아들의 오늘이 있다는 사실에 감동을 넘어 부러움까지 몰려왔다.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내내 어머니가 물려주신 맷집을 감사해 하는 아들의 마음을 묵상하였다. 우리가 잘 나가는 삶을 살 때는 필요 없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삶이 오랫동안 생각처럼 풀리지 않을 때, 환란의 비바람이 불어 닥칠 때, 가족들이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에 노출될 때, 그리고 그런 아픔들이 끝도 없이 이어질 때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맷집이다. 사역자에게 교회의 일들은 즐거움과 감격이다. 충성되게 여겨주셔서 직분을 맡기심이니 감사가 넘친다. 일터가 있고 일감이 있으니 어찌 기뻐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성공적인 사역에는 단단한 맷집 또한 필수적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비유하신 4종류의 밭 가운데 옥토는 1/4에 불과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대개의 씨앗은 길가에 뿌려지고 돌밭이나 가시떨기 밭에서 열매 없이 낭비된다. 이런 낭비들은 우리에게 끝없는 기다림과 인내를 요구한다. 사도 바울도 사역을 이렇게 정의한 적이 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사역은 즐거움이기도 하지만 괴로움의 수고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 맷집은 다른 말로 하면 인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장례가 있던 날 우리 교우들의 비즈니스를 몇 군데 심방했다. 항상 그렇지만 모두 남의 나라에 와서 이만큼 자리 잡고 사업장을 펼치는 모습들에서 그날도 잔잔한 감동을 느꼈다. 그 가운데서 길고 긴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끝없이 주어지는 매를 견디고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된 모습을 보게 된 어떤 교우의 생업의 현장에 가서는 ‘인내하더니 이제 이렇게 결실을 보는구나.’ 하는 감격이 있었다. 나의 맷집이 단단한가? 맷집을 키우라. 그러면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만이 롱런한다. 대가 없이 은퇴한 노후를 즐기는 원로들이 새삼 부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