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진 목사 (샌디에고 반석장로교회)
최근 한국에서는 역사교과서의 국정화 강행으로 인해 여야 정치권은 심각한 충돌을 하고 있으며 국론도 양분되어 온 나라가 뒤숭숭하다. 야당 대표는 ‘역사 구데타’라고 선언하고 장외투쟁에 돌입했고, 여당 대표는 ‘역사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규정하며 국정화 작업을 옹호하고 나섰다. 한국 역사를 전공하는 학자들, 전공대학 교수들은 물론, 한국 역사 교과목을 현장에서 직접 가르치는 전국 초·중·고교 역사교사들이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정권의 의도에 따른 획일화 시도라고 성토하며 집필·제작을 거부하는 선언을 잇달아 하고 있다.
“대통령님 우리는 올바른 역사를 배우고 싶어요.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 어찌 하나일 수 있나요?” 광화문 사거리에서 1인 시위에 교복입고 나선 어느 여고 2학년 학생이 든 피켓 내용이다. 간단한 글 같지만 여기에 깊은 의미가 담겨있다. 불후의 명작, ‘역사란 무엇인가?’를 쓴 E.H. Carr는 과학적 역사 연구로 유명한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인 랑케의 “역사란 결국 객관적 사실이다”라는 정의를 비판하면서, “역사적 사실은 역사가가 사실에 생기를 불어 넣을 경우에만 기술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즉, 역사라는 것은 역사가들이 당시 사실(사건)을 그 시대와 상황에 비추어 역사가 자신의 관점에서 평가하고 판단하여 재구성한 것이기에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의미와 해석에는 다양한 스펙트럼(spectrum)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을 충돌이 아닌 조화의 관점에서 보면 7원색의 무지개 빛깔처럼 훨씬 더 아름다우며 실체에 더 가깝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E.H. Carr는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국정화 시도는 곧 정권의 구미에 맞는 획일화 작업을 의미하며 이러한 역사 획일화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억제하는 전체주의나 전제, 독재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반 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에 가까운 역사 퇴행에 불과한 정치행위일 뿐이다.
1963년 풀리처 상 수상작인 ‘미국적 삶의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를 쓴 리처드 호프스타터(Richard Hofstadter)는 반지성주의를 “지적인 삶과 지성인에 대한 분노”라고 정의하면서 미국의 물질만능주의적, 실용주의적 삶이 점점 다양한 사상과 정신세계의 깊이와 다양성을 추구하는 지적 활동을 백안시, 공격적으로 적대시하며 외면하고 억압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반지성주의적 정치행위는 구체적으로 소수 인권이라는 미명하에 나타나는 동성애 합법화 정책이나. 불법체류자 추방정책이나, 반이민정책으로 구체화 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일본의 아베 정권하에 주도되고 있는 과거 일본주도의 침략전쟁에 대한 미화나, 위안부들에 대한 역사왜곡, 일본 자위대의 제국주의적 환원정책 역시, 반지성주의의 산물들임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신앙의 세계는 어떠한가? 근현대 복음주의는 오랫동안 반지성주의로 인해 심각한 위기를 겪어왔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반지성주의란 기독교 신앙이 일명 ‘값싼 복음’(Cheap Gospel)으로 획일화하여 전락해 버리는 경우를 말한다. 전도한답시고, “무조건 덮어놓고 믿으라”고 한다든지, “믿어야 알게 된다”고 하면서 강요된 믿음을 설교한다. 그러나 구원 얻는 믿음(saving faith)은 영적 속성상 인간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기에(엡2:8), 덮어놓고 믿으라는 것은 가히 억지에 가까운 반지성주의이다. 오히려 편안한 구도자의 마음으로 말씀(text)과 당시의 문화, 역사, 언어적 배경(cultural, historical, linguistic context)들을 살펴가면서 하나님과 그의 나라, 그의 뜻에 대해 차근차근 배워 나가게 될 때에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믿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지성적 상호작용으로 주어지는 ‘믿음’이란 신비로운 은혜의 선물을 ‘적극적 사고방식’이나 ‘긍정의 힘’으로 대체하는 반지성주의를 경계해야만 한다. “무조건 소원하는 대로 기도하면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부적처럼 붙들고 기도하는 기복주의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그 하나님은 언제라도 버리게 된다.
한때 ‘40일 금식기도’, ‘100일 기도’, ‘서원 기도’, 일명 ‘특새’(특별새벽기도)’ 등이 유행병처럼 번져나갔다. 신년이 되면 어김없는 단골메뉴처럼 ‘신년대축복성회’가 시작된다. 그러다가, ‘기도해도 소용없다’는 식의 기도 무용론이 심각하게 스며들며, 환란을 당하면 어김없이 “그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 감각주의적 무신론으로 빠지게 된다. 반지성적 인간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때에는 언제라도 주님을 은30에 팔아먹는 가룟 유다가 될 수도 있으며, 진리를 가까이 두고서도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막15:5)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는 빌라도의 이중적 위험성에 사로잡히게 됨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이 가을에 몇 권의 책을 손에 쥐어보길 권한다. 존 파이퍼(John Piper)의 ‘생각하라’(Think)는 근, 현대 복음주의의 반지성주의를 반박하는 아주 유익한 책이다.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사상과 성경신학에 근거하여 지성이 기독교 신앙의 필수 요소이고, 지성을 극단적으로 거부하는 상대주의와 반 지성주의가 어떻게 비성경적임을 보여주며 그 위험성을 정확하게 지적해주고 있다. 팀 켈러(Timothy J. Keller)의 ‘거짓 신들의 세상’(Counterfeit Gods)도 추천할 만한 책이다. John Stott는 그의 책,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주신 지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영적 천박함이란 죄에 자신을 내던지는 것이다!”고 선언한다. 이 가을에는 사도바울이 고백한대로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는”(고후10:5) 기독교 지성이 무르익어 성숙의 열매를 거두는 은혜의 절기가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