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진 목사 (샌디에고 반석장로교회)
페르소나(persona)는 심리학에서 어떤 개인의 실제적인 내적 모습보다는 타인에게 비쳐지는 외형적 모습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원래 페르소나는 그리스의 고대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Mask)을 일컬어왔는데,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이 심리학적 용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의 심리학적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보통 천 개의 페르소나(가면)를 지니고 있어서 상황에 따라 적절한 페르소나를 쓰고 관계를 이루어간다고 한다. 페르소나를 통해 개인의 생활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반영할 수 있고 자기 주변 세계와 상호관계를 성립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페르소나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심리구조와 사회적 요구 간의 적당한 타협점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이 사회적 요구에 적응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인터페이스의 역할을 하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페르소나를 쓰게 되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 감추어지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신을 위장하기 쉬울 뿐더러 마치 유명한 배우와 같은 연기를 통해 언제든지 타인을 쉽게 속일 수 있다는 것이다. 동일한 개인은 언제든지 다양한 사람들이나 환경에 의해 서로 다른 연기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진정한 자신의 민낯은 언제나 드러나지 않을 뿐더러 다른 사람들에 의해 평가 받는 페르소나에 의해 만족하며 살아가는 운명의 멍에를 스스로 지우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더욱 더 심각한 것은 페르소나에 의해 연기되는 등장인물은 언제나 타인일 뿐 자신은 아니기에, 진정한 자아 상실의 원인을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할 경우 배우처럼 때로는 다양한 모습으로 서로 다른 역할을 연기함을 통해 언제든지 진정한 자아를 숨기고 위장함으로 별다른 양심의 가책도 없이 언제나 위장된 평안에 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페르소나의 위선적인 모습은 인류 조상인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의 민낯의 부끄러움을 가리고 감추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타락한 아담과 하와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해 입었다(창3:7). 위장된 인간은 자신의 민낯을 감추었기에 자신의 죄과를 타인에게 떠넘기는 또 다른 나를 위장해가는 과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자신의 죄과를 인정하고 타인에게 신실하고 정직해야 할 내가 오히려 타인에게 죄과를 떠넘기고 자신은 페르소나 안에서 위장된 안식과 평안을 누리려는 것이다. 결국 페르소나는 자신에게 위임된 책임을 면하게 하고 이웃과의 신실하고 정직한 관계를 변질시켜가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임을 쉽게 이해하게 된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러한 페르소나에 익숙했던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와 충돌을 일으키는 모습들이 여러 곳에 등장한다. 그들은 외형적인 종교행위에 익숙했기에 내면에 간직해야 할 더 소중한 의와 인과 신은 저버렸던 것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마23:23). 페르소나는 하나님의 의를 상실케 하는 위선이다.
예수님의 비유가운데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를 통해서도 페르소나의 허구를 보게 된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9:11-12). 이 비유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의 그럴듯한 율법적 종교행위의 페르소나는 보편적 인간의 죄인된 실체를 가리고 있기에 하나님의 의를 가로막고 있다. 이에 반해 세리의 기도는 오히려 인간의 민낯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드러내고 있다. “세리는 멀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 하나님의 나라와 의는 형식적인 종교행위의 페르소나에 안주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낯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인간들에게 오늘도 임하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평생을 페르소나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서 페르소나를 벗어버린다는 것은 인간의 민낯에 대한 부끄러움과 황당함을 수반하기도 한다. 마치 화장발을 지워버리고 갑자기 민낯으로 마주앉은 아내를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다. 전혀 생소하고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민낯도 자주 대하다 보면, 화장으로 위장한 모습보다 훨씬 더 편안하다. 외형이 아니라 내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화장발보다 민낯이 꽃보다 아름답다. 저녁 거울 앞에서 하루 일상의 때를 다 지우는 순수하고 정직한 모습이 아름답다. 이것을 우리는 ‘순수함’, ‘거룩함’이라 부른다.
성도들이여!, 이제라도 형식적인 종교행위로 위장된 페르소나를 벗어버리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복음의 일꾼들이여! 그럴듯한 목회성공으로 위장된 무화과나무의 페르소나를 벗어버리자. 그리고 민낯을 사랑하자. 민낯의 친밀함이 오히려 하나님의 의와 긍휼, 자비와 사랑을 불어오게 한다. 페르소나를 벗어 던진 맨 얼굴을 보듬어줄 사랑을 하자. 진정한 안식과 평안, 편안함이 깃든 저녁 거울, 그 사랑의 관계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