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진 목사 (샌디에고 반석장로교회)
현대 문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화두중의 하나는 단연 ‘소통’(Communication)이다. 오늘날과 같이 다양한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문화 간의 단절을 극복하고 소통하는 것이 절실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사회에 전염병처럼 만연한 극단주의(Extremism)를 경계해야 한다. ‘극단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인류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보편적 상식이나 사상, 가치체계 등으로부터 동떨어진 사고방식이나 사상, 신념 등을 강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얼마 전, 마크 리퍼트(Mark William Lippert) 주한 미 대사가 민족화해협력국민협의회가 주최한 조찬 강연에서 ‘우리마당’이라는 진보단체 대표를 맡고 있는 김기종씨에 의해 25cm 식도로 오른쪽 안면11cm 상해와 왼팔관통상을 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김기종씨의 피습사건은 단순한 상해사건이 아니라 당시 한미군사훈련에 대한 항의차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외에도 김기종씨는 2010년 7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특별강연에 나선 시게이에 도시노리(重家俊範) 당시 주한 일본대사에게 시멘트 덩어리를 던져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항의한 적도 있었다. 자기주장이나 사상을 관철하기 위해 폭력적 혹은 물리적 가해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그는 극단주의의 부정적 전형임을 보여주고 있다.
원래 극단주의적 행태는 정치, 종교적인 측면에서 강하게 어필해왔다. 과거 이슬람세력을 정복하기 위해 발발했던 십자군 운동이라든가, 그 뿌리의 열매로 나타난 IS(Islam State) 괴물 등은 극단주의의 전형들이다. 독일의 나찌즘, 이탈리아의 파시즘, 일본의 군국주의 역시 근, 현대사에 나타난 대표적인 극단주의의 정치형태들이다.
극단주의는 이미 예수님 당시에도 존재해왔다. 대표적인 극우적 형태로 나타난 종교집단은 율법중심적인 바리새파이며, 극좌적인 형태로 나타난 집단은 사두개파와 헤롯당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극단주의들의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교훈들로, 누룩과 같이 사악한 것이었기에 주님은 저들을 경계하라고 주의하셨다(마16:6, 12; 막8:11). 바리새파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장로들의 유전을 더하여 정죄와 판단을 일삼았으며, 사두개파들은 하나님의 영이나 천사들, 육체 부활 등을 신앙에서 배제해버렸고, 헤롯당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져버리고 철저하게 로마식민지의 정치적 집단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오늘날 신학적인 극단주의 역시 경계의 대상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칼 바르트의 신 정통주의(Neo- Orthodoxism)에 뿌리를 둔 로버트 펑크와 존 도미니크 크로산에 의해 1985년에 시작된 “역사적 예수운동”(Historical Jesus Movement), 포스트모더니즘에 뿌리를 둔 존 힉의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 혼합주의(Syncretism)형태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구원의 유일성 등을 철저하게 테러해오고 있다. 또 다른 극단인 극우의 경우는 어떠한가. 신비적 은사주의 운동인 Toronto Blessing, Vineyard Movement, IHOP 등의 제 3의 물결을 비롯하여 적극적 사고방식(Positivism), 긍정의 힘을 통한 기복적 성공지상주의(Sucessism)등은 복음을 위장한 다른 복음(another gospel)의 전형일 뿐이다.
특히 양극단은 주관주의적(Subjectivism)이라는 측면에서 한 배를 타고 있음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한 쪽은 이성과 과학주의적 합리성에 의존하여 거룩한 그리스도의 신성을 유린하고 있고, 다른 한 쪽은 개인의 신비적 경험이나 환상 등에 의존하여 성령의 인격성을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기능주의, 도구주의로 전락시키는 불경을 범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총회나 노회, 교회 안에서도 극단주의적 행태가 복음주의적 삶을 천박하게 유린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세속화를 가속화 하고 있음을 애통해 한다. 복음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아디아포라’(adiaphora)를 자신의 유익과 명예만을 위해 강제하거나(롬14장 참고), 타인을 배제하기 위해 인격적 살해는 물론 피차 고소하며, 심지어 사회법정으로 나아가는 일이 이제는 부끄럽지 않은 일상이 되어가고 있음을 개탄한다.
진정한 복음적 소통은 무엇인가? 이것은 양극단을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다리 놓는 일(Making Bridge)이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이 되어 십자가에서 화목제물로 죽으시기까지 하나님과 세상을 다리 놓으시되 온유와 겸손으로 하셨다. 우리의 신앙과 신학적 적용에 있어서도 극단주의를 철저히 경계하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자기 포기를 선언하며 주를 닮아 온유와 겸손으로 성육화 될 때에 비로소 진정한 복음적 소통(Gospel Communication)을 이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