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녕 사모 (프린스톤한인교회)
“다윗이 군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입었더라”(삼상30:6b). 하나님과 동행하는 희대의 왕으로 빚어지는 다윗의 광야 훈련이 정말 장난이 아니다. 시간이 흐른 후에야 하나님과 동역자인 왕되는 훈련임을 깨달았겠지만… 하나님의 뜻이 잘 보이지 않고 죽을 맛의 어려움만 첩첩 산중으로 다가오니 그 당혹스런 마음을 헤아려 본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연속의 폭풍 중에 다윗은 이제까지 함께 하시며 선한 목자되시었던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 분의 불변하는 성품을 의지함으로 계속 두려워 떨리는 자신을 믿음의 반석위에 올려놓는다. 그의 위기에 대처하는 전철이 광야 학생의 교과서가 된다. 하나님을 잘 바라보다 촌각을 다투는 위기 상황에서 아군의 추격을 피해 상상외로 적국으로 피신하고, 왕이 제 목숨 살리려 미친 척을 다하지를 않는가? 기막힌 궁지에 몰려 인생의 바닥을 친다. 죽음 앞에선 모든 자존심도 명함도 없다. 이런 비참한 모습으로까지 발가벗기셔야만 자신의 속수무책인 모습을 절감하게 되는 것 같다.
하나님은 주의 사람을 훈련시키실 때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문제들로 우리를 둘러쌓여 도무지 앞날을 한 치도 보지 못하게 하시며 하나님을 전폭으로 의지하는 것이 해결의 직통 코스임을 가르치신다. 눈에 불을 키고 다윗의 죽이려고 목숨건 사울의 추격이 다윗을 괴롭히는 풍랑이라면 그가 탄 배는 어떤 세상 풍랑에도 꺼떡 않는 안전이 완전 보장되었다. 쫒기는 반면 그를 돕는 자들 또한 예비하시고, 그로 인해 억울한 자들이 모두 다윗에게로 모여드는 계기도 된다. 누가 누구를 쫒는 것인지? 겉으론 분명 다윗이 쫒기는 자인데… 쫒기는 다윗은 따르는 사람들이 불어나고, 반면 쫒는 사울은 저가 악을 따르는 만큼 따르는 사람들이 주위에서 사라진다. 오직 간신, 이방인들이나 아부위해 고자질할 따름이다. 다윗을 죽이려는 집착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것인 왕의 자리를 제대로 누려볼 시간이 없다, 저는 왕이건만 어째 하루 단 몇 시간이라도 마음의 모든 번민을 놓고 쉬질 못하고 시기심으로 왕위를 빼길까 두려움에 휘둘리는가?
다윗이 육체적으론 힘들고 고달파도 사울의 번민에 비하면 저는 늘 기도하면 들어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이 어디서나 언제나 함께 하시니 저의 마음은 평안하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부추기는 감정에 휘둘리는 사울을 통해 움켜지고자 몸부림치는 권력의 만용이 실제론 다윗에게로 이스라엘에게로 민심이 돌아오도록 다윗의 왕위를 다져 주시지 않는가! 적에게 자신을 의탁하고 미친 척까지 하며 자기 목숨을 구사일생 살아난 듯 보이지만… 과연 하나님은 다윗이 만나는 모든 화들을 복으로 바꿔주시는 기막힌 삶의 운영의 묘를 발휘하신다. 죽어라 쫒는 사울의 광기가 다윗에게 와서는 복으로 희한하게 바뀌는지 입이 벌어진다.
그뿐 아니라 본인이 정말 미치고 팔딱 뛸 억울한 일을 10년간이나 사울에게서 당하는 바람에 억울한 자들의 심정을 너무도 잘 안다. 억울한 자들을 위해 진정으로 생명을 내놓는 백성의 성군되는 훈련을 통과한 저가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을 보면 참으로 너그럽고 감동스럽다. 심는 대로 거두지 않는가? 힘이 무서워 벌벌 떨게 누르는 폭군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 충심으로 왕을 사랑하게 하는 인복을 최대로 끌어낸다. 계약관계가 아닌 사랑의 관계로 왕과 백성사이를 이끌어낸 희대의 성군이 된다. heenlee5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