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인도의 도를리(Dorli)

도를리족은 인도에서 가장 큰 부족인 곤드족의 소 부족중 하나다. 역사적으로 곤드족은 인도 원주민의 가장 중요한 부족이었다. 1500년대 몇 개의 곤드왕조가 그들의 통치자, 힌두교도의 군주 같은 “라자스”(Rajas 왕 또는 통치자)를 세웠다. 곤드왕조는 1592년 무슬림 군대에 의해 정복당해 모든 통치권 지위를 상실했다. 그러나 그들의 부족들은 행정적 변화에 곤혹을 당하지 않았다. 언제나 독립된 부족으로서 엄격한 힌두의 카스트(사회계층)에 말려들거나 자신들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았다.

오늘날 도를리족은 인도의 중부인 맛디야 파랴데쉼(Madhya Pradesh) 지부의 바스탈(Bastar)에 있는 두개의 최남단 콘타(Konta)와 비쟈펄(Bijapur) 지역의 평원에 거주하고 있다. 일부는 안드라 프라데쉬(Andra Pradesh)와 오리사(Orissa)에 살고 있다. 그들의 고국땅은 동쪽의 광활한 평원과 사바리(Sabari)강 주변으로 협소한 계곡 있는 곳으로부터 남서쪽 숲과 구릉이 있는 곳까지 다양하다. 이들의 언어는 이웃하고 있는 텔루구(Telegu)족에 매우 깊은 영향을 끼쳐온 도를리어를 사용하고 있다.

삶의 모습

대부분의 도를리인들은 전형적인 유목민인 곤드(Gond)족과 달리 영구 정착촌에 살고 있다. 그들은 여러 종류의 잡곡들을 재배하며 사유 채소밭도 소유하고 있다. 농부들은 일년농사로 가족을 부양할 충분한 양식을 수확하기 어렵다. 그래서 산림 속에서 채취한 임산물에 의존하기도 한다. 도를리족의 일부는 척박한 토지를 떠나 도시로 나가 도로건설 같은 막노동을 하고, 어떤 이들은 가축을 사육해 필요한 생필품을 구입한다. 대부분의 도를리족들은 힌두교 신자들이지만 제물로 올려진 육식이나, 호랑이가 죽인 것이나, 자연사한 것이나 가리지 않고 먹는다.

도를리족들은 창문이 없는 진흙으로 된 벽과 초가로 된 작은 오두막에 살고 있다. 마을은 협소하지만 일렬로 된 한 공터가 있는 여러 채의 집들로 구성된다. 이런 공간에서 촌부들이 함께 모여서 행사를 벌린다. 원시상태의 모습이 남아 의복은 아직 이들에게 낯설다. 사냥과 방어를 위해 대다수 활과 화살이 주 무기로 사용된다. 농사에 필요한 농기구는 만들 수 없어 가까운 이웃마을에서 토기, 철기, 운반기구 등을 의존하며 의복이나 패물도 주말에 열리는 장터에 가서 매입한다.

도를리족들은 네 지역 부족으로 나뉘었다. 각 부족은 다시 다섯 개 그룹으로 나뉘거나, 씨족들(gattas, 한조상 안에서 많은 씨족들이 구성)로 나뉜다. 결혼은 같은 씨족 안에서는 금지된다. 신분이 낮은 계층과의 결혼 “에로-가타(Ero-gatta)는 멸시를 받는다. 대부분 결혼은 합의 하에 이뤄진다. 신부의 값을 지불하는 것 은 필요하지 않지만 신랑측 가족은 마을 잔치를 맡아야 한다. 젊은 신혼부부는 일반적으로 시집식구들 근처에서 기거하지만 막내아들은 결혼 후 그의 부모들과 함께 계속 동거하며 산다.

신앙

도를리족은 기본적으로는 힌두교도들이지만 부족에서 부족으로 내려오면서 다양한 신앙으로 복합적이고 다양한 정령숭배를 하고 있다. 그들은 만신들, 여신들, 정령신을 숭배하며 해, 달, 그리고 별들도 신이 있다고 믿고, 조상의 혼들이 가옥의 신으로 받들어진다. 도를리족들은 종종 언덕과 밀림, 그리고 물에 신이 있다고 믿고, 물신은 뱀의 형태를 갖고 있다고 믿는다. 가장 중요한 신들은 나무 아래 모셔 넓적한 돌로 표출하고 있다. 촌부들은 창조주 신 “뒤울”(Deur, 하늘 저편에 살고 있다고 믿음)은 그 형태가 개념적으로 떠오르지 않아 인간의 꿈으로 나타난다고 믿는다. 부족들안에서 마법은 사악하고, 혐오스러운 행위로 보고 있다. 만약 누군가 흑 마술을 하다 걸리면 부족으로부터 축출은 물론 공개적으로 몰매를 맞는다.

필요로 하는 것들

도를리족이 이해할 수 있는 기독교 자료가 부재한 상태에 있다. 매우 적은 원주민 성도들이 힘을 얻도록 중보기도와 복음화에 필요한 자료를 공급해주고. 복음이 닫지 않는 곳에 전략적 선교노력이 필수적으로 가시화 돼야 할 것이다.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