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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의 난갈라미(Nangalami)

20세기가 시작될 때까지 아프가니스탄 땅은 주로 여러 종족들이 연합해 통치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항하는 우두머리들과 외국 정부들이 아프가니스탄을 통제하려 했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은 독립국가지만 내전이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는 70개 이상의 종족들이 살고 있으며, 난갈라미(그란갈리로도 불림)족은 아프가니스탄 전체 인구의 1% 미만인 소수다.

난갈라미족이 코나르(Konar)강 남쪽 기슭의 그랑갈리와 제미아키, 두 마을에 산다는 것 외에는 난갈라미족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이 지역의 기후는 온화하며 농작물을 재배하기에 적당하게 강우가 충분하다. 난갈라미라는 이름이 종족명에 따라 마을명이 붙여진 것인지, 마을명에 따라 종족명이 붙여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난갈라미족의 언어는 그랑갈리어라고 불리며, 이 언어는 인도-이란 언어군에 속한다.

삶의 모습

아프가니스탄의 경제는 본래 농업과 목축에 기초한다. 산악 지역에는 비옥한 땅이 거의 없는 반면 좋은 목초지가 있다. 그 결과 난갈라미족은 유목적인 생활방식을 취해 계절을 따라 가축 떼를 데리고 이동한다. 이 지역의 다른 종족들과 마찬가지로 난갈라미족은 기능공들인 하위 계층과 토지소유자들인 상위 계층 두 계층으로 나뉘어질 것이다. 기능공들은 주로 나무공예품, 직조, 제철, 도기, 바구니 등을 만드며, 이 물건들은 모든 마을 사람들이 사용하게 된다. 시장(Bazaar)은 농산품과 기능품을 교환하는 중요한 장소가 된다. 전통적인 수공업품들은 널리 보급돼있으며, 질이 좋고 매우 정교하다.

난갈라미 사회의 기본 단위는 농사짓는 땅과 목초지로 둘러싸인 촌락이다. 토지는 가족의 남자 우두머리의 소유이며, 목초지 사용의 권리는 그의 아들에게 상속된다. 협력은 혈족관계에 의해 이루어지며 친척들은 위기나 도움이 필요한 때에 서로서로 돕는다. 일반적으로 가옥들은 언덕의 경사면을 따라 세우되 깨끗한 물을 얻기 위해서 시내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가옥의 크기는 그 가족의 부에 따라 달라진다. 집안은 돌담으로 생활을 위한 곳과 가축을 위한 곳, 두 부분으로 나뉘게 되며, 집안 소유물들은 돌담으로 둘러싸게 된다.

계층 구별 외에도 난갈라미족은 성에 따라 노동이 구별된다. 전통적으로 남자와 여자 모두 식사를 준비하는데 나름의 일을 해야만 한다. 여자들은 빵을 준비하는데, 빵은 농사에 대한 책임을 상징한다. 남자들은 낙농의 소산을 제공해야만 하고, 이는 가축을 치는 책임을 상징한다.

신앙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에게 이슬람교가 소개된 것은 7세기경 아랍의 침입 때였다. 9세기까지 다르와지족이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오늘날에는 다르와지족의 100%가 수니파 이슬람교도들이며, 기독교인으로 알려진 사람들은 없다. 다르와지족은 이슬람교도로서 유일신 알라를 믿으며, 매일 기도하고, 자선을 베풀고, 금식하고, 가능하다면 메카로의 성지순례를 한다.

필요로 하는 것들

아프가니스탄의 다수 종족들 간의 관계는 갈등으로 점철돼있다. 역사적으로 좀 더 강했던 종족들이 약한 종족들을 지배하고자 했었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누리스타니족은 강하게 저항했다. 소련의 침공과 계속되는 내전은 아프가니스탄을 파괴시켰다. 남아있는 사회적 구조는 거의 없으며, 많은 이들이 고향을 떠나 피난길에 올라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을 찾아갔다. 아프가니스탄 안에서 사역하는 선교단체들이 있지만, 매우 위험한 상태이며 선교단체 관련자들이 철수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난갈라미족을 위해 사역하는 단체는 없다. 난갈라미족에게 많은 지원과 노력이 필요한데, 이전에 무엇보다도 내전이 끝나야만 할 것이다. 계속적인 열정적 기도로 우리는 이 일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르와지족을 섬기고 아프가니스탄을 다시 세울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주어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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