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블라족 사람들은 인도 서부의 중앙 해안을 따라 살고 있으며, 주로 구자라트 주, 마하라쉬트라 주, 카르나타카 주와 라자스탄 주에 거주한다. 그들은 브힐 계통의 언어인 두블라어를 사용하며, 인도-아리안 어계에 속한다. 두블라족은 12개의 하위 종족으로 나뉘어지며, 이 중 탈랄비아스족이 가장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다. 오래 전 구자라트 주의 문화적 번성기에 주변 지방의 사람들이 이주해왔다. 구자라트는 마라타족의 표적이 됐는데, 마라타족은 여러 해 동안 해마다 이 지역을 침략했다. 마침내, 무슬림들은 경제적 이익을 얻을 목적으로 수라트 동부에 축성을 쌓았다. 두블라인들은 무슬림들의 압력 때문에 더 남쪽으로 이동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1817년, 영국인들이 권력을 잡고 마라타인들이 남겨놓은 것을 고치려고 시도했었다. 당시 농지는 정착민들에게 분산돼있었다. 라즈푸트의 오랜 압제 기간과 다른 무법자들로 인해 두블라인들은 노예로 팔리는 신세가 됐다.
삶의 모습 농업 노예제는 1923년까지 존속됐으며, 그 때까지 두블라인들은 지주들에게 예속돼있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빌리기 위해 그들의 주인에게 철저히 의존적이었다. 지주들은 두블라인들이 빌린 것을 갚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블라인들은 그들의 주인들에게 충성과 존경과 복종을 바쳤다. 종들은 그들의 주인에게 경제적 안정을 제공하면서 주인 가까이에 살았다. 일단 노예제는 폐지됐고, 땅을 소유하지 않은 두블라인 농부들의 수는 늘어갔다. 노예 노동력의 상실로 지주들은 큰 타격을 받았다. 노예의 구속으로부터 하루 품팔이 노동자의 자유를 얻게 된 이후, 정부는 두블라인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돕기 위해 재정적 지원을 하고 있다. 오늘날, 두블라인들은 매우 완고하고 다루기 힘든 종족이다. 아마도 오랫동안 열등한 노예대접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현재 소작인, 하인, 임시 자유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그러나 충분하고 지속적인 일자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떠돌이 노동을 하고 있다. 그들은 모든 가족을 이끌고 봄베이 근처의 벽돌공장에서 1년 중 일곱 달을 보낸다. 두블라인의 대부분이 아직 그들 소유의 땅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농부들 중 가장 가난한 자들로 남아있다. 마을 사람들은 농업 생산물의 판매와 소비재 구입을 소매상인에게 의존하고 있다. 두블라족 마을은 다른 브힐족의 마을 근처에 작은 강변을 따라 위치한다. 두블라인들은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 속하며, 전형적으로 방 하나짜리와 진흙벽돌로 된 굉장히 낮은 초가지붕 집에서 생활한다. 정부의 지원으로 일부 사람들은 기와지붕을 가질 수 있었으며, 좀 부유한 사람들은 나무나 벽돌로 된 집에서 살기도 한다. 그들의 오두막이 차례로 줄을 맞춰 지어져 있지는 않지만, 함께 모여 있다. 겨울의 추위와 열대성 강우로부터 모든 가족들을 보호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오두막에 거주하는 평균 가족수는 증가했다. 그들의 집을 삼켜버린 홍수 때문에 그들은 몇 해 동안 이웃 지역으로 이주해야만 했다. 이 마을사람들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과 거의 접촉이 없다. 두블라인들은 온순하면서도 다루기 힘든 완고한 종족이며, 사람들은 힘든 생활에 지친데다 또한 술에 빠져있다. 어떤 사람들은 적절한 교육이 그들의 뒤떨어진 마을 생활로부터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학교 출석률은 여전히 낮으며,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이 10% 정도일 뿐이다.
신앙 사실상 두블라인 모두가 힌두교도다. 그들은 영적인 안내를 받기 위해 바가트(bhagat, 사제이자 치료자)에 의존한다. 바가트는 신과 교접할 수 있는 최고의 "선한 사람"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친구이자, 철학자, 안내자이고, 치료자로서 여겨지고 있다.
필요로 하는 것들 현재 1개의 선교단체가 두블라 안에서 사역하고 있지만,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해질 수 있는 기독교 자료들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성경은 아직 두블라어로 번역되지 않은 상태다. 이 귀중한 민족 가운데 사역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눌 교사와 선교사, 인도적인 조력자들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