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규서 목사 (월셔크리스천교회)
추석 명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먹거리가 풍성한 명절인 추석은 그야말로 기대되는 날이었습니다. 햇곡식으로 송편을 빚어 솔잎을 깔고 찌면 그 향은 온 집안에 가득하게 퍼져 입맛을 돌게 했습니다. 송편을 만들기 위해 속을 넣는 재료에 따라 그 맛이 달랐는데 콩 또는 참깨를 넣어 만들었습니다. 참깨를 넣은 것이 제일 맛있었기에 송편을 쪄놓은 커다란 바구니에서 참깨를 넣은 것을 골라먹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또한 추석이 오면 ‘추석빔’을 기다리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빔’이란 단어는 ‘꾸미다’란 뜻을 가진 동사입니다. ‘다’(꾸미다의 뜻을 가진 동사)의 명사형인 ‘옴’으로부터 변화한 어형으로 옴>비옴>비음>빔의 과정을 거친 것으로 ‘추석빔’은 ‘추석에 꾸밈’, 또는 ‘추석에 장식하는 것’을 뜻합니다. 형제들이 많다보니 형이 입던 옷을 물려 입었던 시절이라 새 옷을 입는다는 것은 명절이나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바지의 재료는 ‘골덴’으로 만든 것이 보편적이었습니다. 그 ‘골덴 바지’는 조금 입으면 무릎이 튀어 나오고 쉽게 구멍이 나서 실용적이지가 못했습니다. 그래서 동네 개구쟁이의 엄마들은 옷 특히 엉덩이와 무릎을 다른 천으로 덧붙어 입히곤 했습니다. 어느 해 가을에는 ‘나일론’을 소재로 한 바지가 유행을 했습니다. 그 바지는 참으로 획기적이었습니다. 질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색상도 다양하여 아이들의 로망이었습니다. 그해 추석 우리 형제는 집 앞 문에서 아버지가 퇴근하시길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웬걸 아버지는 빈손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빈손의 아버지가 어찌나 원망스럽던지 서운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알게 된 사연은 나의 그 서운함을 자부심으로 바꾸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한전’에서 근무하시면서 가난한 이웃들의 전기요금을 대신 납부해주셔서 늘 월급통투는 얄팍했고 그 때문에 추석에 사랑하는 아들들에게 ‘추석빔’을 선물할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자녀들에게 ‘추석빔’을 선물하는 풍속은 사라지고 부모님께 명절선물을 드리는 풍속이 되었습니다. 지방에서 목회를 할 때 교인 가정에 자녀들이 명절을 지키기 위해 부모님이 계신 고향집으로 오는 모습들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양손에 선물꾸러미를 가득 들고 버스를 타고 혹은 기차를 타고 달려왔습니다. 가난한 살림에 일찍 도시로 나간 자녀들은 산업전선에서 고생하면서도 명절이 되면 많은 선물을 들고 부모님을 섬겼습니다. 위험하고 고된 일을 하면서도 명절이 되면 어김없이 부모님을 찾아뵙고 명절을 보냈습니다. 그들을 맞이하던 어른 교인들의 환한 모습이 생생합니다. 자녀들이 다녀가면 서로 선물을 펼쳐 보이면서 자랑을 하곤 했습니다. 명절이 낀 주일에는 교인들과 귀향한 그들의 자녀들이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 가족의 명절은 그들이 돌아간 후에 어머님이 계신 서울에서 보냈습니다. 그러느라 어머님과 제대로 된 명절을 지낸 기억이 없습니다. 도미하여 살다보니 명절은 더군다나 관심에서 멀어졌고 무심히 지내게 되었습니다. 올 봄 고국방문을 하여 처가에 머물렀습니다. 장모님께서 지난 명절에 전복과 버섯을 잘 먹었다고 하시면서 귀한 것을 보내주어 고맙다고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장가보낸 아들놈이 멀리 계신 외할머니께 명절선물을 보내드린 것이었습니다. 칭찬하시는 장모님의 환한 얼굴이 마치 옛날 지방목회 시절 어른 교인들이 자녀들에게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그 모습과 같았습니다. 추석이 다가옵니다. 금번 추석에는 어머님께 장모님께 그동안 하지 못했던 명절선물을 해보려 합니다. 그들의 환한 미소가 지구 이쪽, 저쪽에 멀리 퍼지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