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규서 목사 (월셔크리스천교회)
세계 경제의 심각성과 미국 경제의 악화로 달러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금으로 투자를 대신 하는 풍조에 금값이 천정부지로 뛰고 있는 실정입니다. 금은 예나 지금이나 부의 척도이며, 최고의 가치를 부여받아 왔습니다. 한 때 금을 캐려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 캘리포니아로 몰려들어 ‘골든러쉬’를 이루었던 때도 있습니다. 각국에서 혹은 국내 각처에서 목슴을 걸고 이곳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실제적으로 골든러쉬가 일어나게 된 때는 1790년대 브라질의 금광들이 고갈되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풍부하게 유입되던 금의 양은 점차 줄어들게 되었고 라틴아메리카 지역에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독립전쟁으로 약20년 동안 생산에 차질을 가져오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편승하여 세계경제와 금융 시스템이 빠른 속도로 팽창하면서 화폐로서 또 화폐의 기준으로서 금의 역할이 이전보다 훨씬 더 중요해지면서 새로운 금 공급원의 발견이 절실하였기 때문입니다.
19세기 골든러쉬는 1849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되어, 1859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남아프리카에까지 번졌습니다. 캘리포니아 골든러쉬는 1848년 존 서터(Johann Sutter)란 사람이 제재소에서 작은 금조각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미디어가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금발견에 대한 소식은 늦게 미전역에 퍼지게 되었고 존 서터가 금을 발견한지 수개월이 지난 후 골든러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로부터 4년 후에는 캘리포니아의 인구는 예전에 열배 이상 늘어난 약 25만 명이나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골든러쉬로 인해 전 세계인이 캘리포니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항간에 소문으로는 두 달만 캐면 20년 치 월급을 벌 수 있다하여 목숨을 건 사투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과거에 금이 발견되면 왕이나 정복자가 소유주가 되었지만 캘리포니아 골든러쉬는 누구든지 금을 찾아내기만 하면 장소나 양에 상관없이 자기가 소유할 수 있다하여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이곳 캘리포니아로 모여들게 했습니다. 그러나 골든러쉬로 인해 부자가 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 할 뿐 많은 부작용과 허영, 방탕한 생활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1851년에 캘리포니아의 금생산량은 85톤으로 늘어났습니다. 이 한 해의 금생산량이 전체 연방예산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1853년에는 생산량이100여 톤으로 높아졌고 이에 따라 냇물이나 강에서 채취할 수 있는 금은 점점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장구할 것만 같았던 골든러쉬도 겨우 4년 밖에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며칠 전 신문에 아주사 계곡에서 금을 채취하고 있는 사람들의 사진과 더불어 “최근 아주사 ‘이스트 포크’ 계곡이 새로운 ‘골드러시’를 경험하고 있다”라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금값이 온스당 1600달러를 돌파하면서 ‘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합니다. 평일 오전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배낭에 금 캐는 도구를 넣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산길에 배낭을 짊어진 사람들로 붐볐으며 그들의 행색은 단순히 등산을 하기 위함이 아닌 금을 캐고자 양동이와 삽을 주렁주렁 매달고 산을 오르고 있었으며 계곡에 이르자 20여 명의 금캐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주사 계곡에 다시 모여드는 사람들 물론 과거와는 달리 한탕을 노리는 사람들이 아닌 직장을 잃고 생계를 위해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금을 열망하는 그들의 마음은 예나 다를 바 없다고 여겨집니다.
‘아주사’라는 이름을 대하니 ‘아주사의 부흥운동’이 생각납니다. 아주사의 부흥운동은 노예후손 시무어 목사에 의해 이곳 LA에서 일어난 초대교회 이후 세계를 변화시킨 부흥운동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100년 전인 1906년 4월9일 다운타운의 작고 초라한 가정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한인타운에서 멀지 않은 노스 보니브레아(N. Bonnie Brae St.) 216번지에서 예배를 드리던 신자들에게 방언이 터지면서 이곳 LA를 시작으로 하여 곧 뉴욕과 시카고 미주 전역을 거쳐 아시아와 유럽으로 번지게 되는 역사에 남을 부흥운동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후에 부흥의 불길은 차고 넘쳐서 보다 넓은 장소인 아주사 312번지에 있는 창고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아주사 부흥운동의 일화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치유사역의 허구성을 드러내기로 작심한 LA타임스의 기자가 소아마비를 가장하여 부흥회에 참석했고 기도를 요구하자 시무어 목사님은 “그대로 이루어질지어다!”라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대로 외쳤고 그 기자는 그 자리에서 소아마비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 일로 인해 기자는 회심하여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주사 부흥운동은 약 3년 동안 계속되며 오늘날 오순절계통 교회의 초석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부흥의 물결로 출렁거렸던 아주사 312번지는 일본인 상점과 건물이 들어서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고 아주사 부흥운동이 그저 전설처럼 전해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갈수록 메마른 이 LA땅에 새로운 ‘골든러쉬’를 꿈꾸듯 ‘아주사의 부흥운동’이 불같이 일어나길 소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