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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으로...

생명의 시간

엄규서 목사 (월셔크리스천교회)

혈액 두 방울로 인간의 생명 시간을 알 수 있다는 광고가 기사에 실렸습니다. 미국 유일의 상업적 병리 검사 기관인 ‘스펙트라셀’은 텔로미어 분석 서비스를 통해 인간 세포의 생물학적 나이를 혈액 두 방울과 비용 290달러를 보내면 인간의 생명 시간을 알려준다는 내용입니다.

텔로미어란 유전 정보를 담고 있는 염색체 가닥의 양쪽 끝에 붙어 있는 꼬리입니다. 체세포가 분열할 때마다 점점 짧아지게 되는데 그 길이가 너무 짧아지면 세포는 분열을 멈추게 되고 죽는다는 것입니다. 혈액내 백혈구의 테로미어 길이를 측정해 세포의 연령, 노화의 정도를 판별해 준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텔로미어가 짧은 노인과 긴 노인을 연구 실험한 결과 텔로미어가 짧은 노인은 긴 노인에 비해 사망률이 거의 두 배라는 결과도 있습니다.

이 사업에 흥미를 갖고 텔로미어 연구로 2009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인물인 UC 샌프란시스코의 엘리자베스 블랙번 박사는 최근 ‘텔롬 헬스’를 공동 설립하여 서비스를 시작할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블랙번과 노벨상을 공동으로 수상한 존스 홉킨스 대학의 개럴 그라이더 박사는 반대 의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텔로미어가 가장 짧은 1%사람들은 골수 질환, 폐섬유증 등에 걸릴 가능성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그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단순히 텔로미어 길이로 인간의 생명을 알 수 있다는 과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또 DNA샘플을 낸다 해도 당사자의 나이를 판별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를 강하게 지지하며 미국 과학 및 건강 위원회에서도 ‘수명 예측은 돌팔이 같은 짓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수명을 알 수 있다면 이 사회는 매우 혼란에 빠질 것이 자명할 것입니다. 만약 삶의 시간이 짧은 사람들은 일은 하지 않고 먹고, 마시고, 즐기고, 죄를 짓고 살다가 죽기 바로 전에 회개를 하고 천국을 가겠다고 어리석은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는 반면 삶의 시간이 길다면 게으름을 피우고 내일하지 아니 다음에 하지 미루면서 하루하루를 보낼 것입니다. 인간의 수명을 안다는 것은 이 세대를 살아가는 누구에게도 결코 유익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삶의 순간을 아는 인간의 심정을 그린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28세 때 내란음모 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일입니다. 영하 50도가 되는 추운 겨울날 형장에 끌려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형 집행 시간을 기다리며 시계를 보니 살 수 있는 시간이 딱 5분 남아 있었습니다. 28년을 살아왔지만 단 5분이 천금 같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는 남은 5분을 어떻게 쓸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형장에 함께 끌려온 동료들에게 인사를 하는데 2분, 오늘까지 살아온 인생을 생각하는데 2분을 쓰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남은 1분은 이 시간까지 발붙이고 살던 땅과 자연을 둘러보는데 쓰기로 했습니다. 작별 인사를 하는데 2분을 보내고 삶을 정리하자니 문득 3분 뒤엔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눈앞이 캄캄하고 정신이 아찔했습니다. 다시 한 번만 살 수 있다면 순간순간을 정말 값지게 살 수 있을 텐데 아쉬움이 그를 억눌렀습니다. 후회의 순간 흰 수건을 흔들며 황제의 특사령(特赦令)을 가진 병사가 도착했습니다. 그는 사형을 면하게 되었고 시베리아에서의 유형 생활을 통해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명작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톨스토이는 작품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통해 죽음의 때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미가엘이란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벌로, 지상에서 구두직공이 되어 일을 했습니다. 미가엘은 일하면서 몇 가지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그중의 하나가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어느 날 한 신사가 천사인 줄 모르는 이 구두직공에게 “한 일 년 동안 튼튼하게 신을 구두를 만들어 달라”고 말했습니다. 미가엘이 보니 그 신사 옆에 죽음의 천사가 있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일 년 동안 신을 구두를 주문하는 것을 본 미가엘은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 이 죽음의 날짜를 아는 것임을 알고 엷게 웃었습니다. 우리 속담에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죽음의 순간을 안다면 고통의 연속일 것입니다. 그 순간을 모르는 우리는 ‘행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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