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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로 가슴이 불타는 부흥

여승훈 목사 (시카고 가나안교회)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보편적으로 많이 듣는 용어중의 하나가 ‘부흥’이란 단어다. 한국 교회 집회 타이틀 가운데서 가장 익숙한 표현도 ‘부흥회’다. 부흥에 대한 정의를 웹스터 사전에서는 “비 활동적 휴면상태에서 생명과 능력으로 활력을 얻고 새롭게 일어나는 영적 각성 상태”라고 말하고 있다. 한마디로 죽었다가 살아난 상태를 가리킨다. 죽었다가 살아난 상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더 쉽게 표현하면 무엇으로 당신이 죽었다가 살아난 상태라고 증명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을 하기 전에 먼저 부흥에 대한 잘못된 개념부터 다루어 보도록 하자.

부흥에 대한 잘못된 개념은 대략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우울하고 침체되었던 감정이 올라가는 것으로 부흥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World Religion 과목 시간에 힌두교 종교 집회에 참석했던 적이 있다. 수백명의 사람들이 노래하고 춤을 추며 오랜 시간동안 온 몸에 땀을 흠뻑 적시며 거의 무아지경의 황홀경에 빠질 정도로 흥겨워하였다. 그들의 얼굴은 마치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전혀 없다는 행복한 표정이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힌두교뿐 아니라 그외 다른 종교에도 감정적으로 흥분하게 하는 종교적 요소들이 충분히 존재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육신의 감정이 올라가고 행복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반드시 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지금 나는 무엇 때문에 내 감정이 행복해하고 흥분하고 있는가?” 만약 여기에 대한 대답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 때문”이라는 대답이 아니면 그 감정들은 정확하게 잘못된 감정이다. 유사한 감정일수 있고 유사한 행복일수 있다.

두 번째는 교회가 숫자적으로 불어나는 것이 부흥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어느 목사님이 교회성장을 위해서 금식 기도하며 간절히 매달렸더니 어느 주일날 갑자기 십여 가정이 몰려오는 일이 있었다고 자랑 삼아 이야기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열 가정 가운데 일곱 가정이 그 교회를 떠나는 일이 발생했다. 자, 이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아니면 부흥이 사라졌다고 말해야 할까? 많은 사람들이 부흥의 기준을 숫자로 측정하고 있다는 것이 현대 기독교가 크게 오판하고 있는 부분이다. 숫자를 부흥의 가늠자로 이해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영혼으로 보이지 않고 숫자로 취급 되는 서글픈 일이 생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천하보다 귀히 여기는 소중한 영혼들이지 짐승들에게나 사용되는 무더기 혹은 떼거리의 숫자가 아니란 말이다.

참된 부흥에 대해 성경말씀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누가복음 24장에 가면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 이야기가 나온다. 위대한 능력을 발휘해 줄줄 알았던 스승 예수님이 십자가에 힘없이 못박혀 돌아가신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하고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힘없이 걸어가던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누가복음 24:27).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이 무엇인가? 구약성경을 가리킨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두 제자들에게 무엇을 하신 것인가? 구약성경에서 예수님 자신이 구속사역에 관해 자세히 설명하여 주신 것이다. 한마디로 예수님 자신이 누구시며 무엇을 행하기 위해 오셨는가에 대한 내용이다. 설명을 들은 두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했는가?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누가복음 24:31-32). 어떤 반응이었는가?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고백한다. 무엇 때문에 마음이 뜨거워졌는가? 구약 성경을 통해 설명 되어진 예수님 자신이다. 즉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 예수님으로 인하여 마음이 뜨거워진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짜 부흥, 참된 부흥이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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