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창수 목사 (남가주사랑의교회)
교회에서 고등부 회장을 맡고 있던 때의 일입니다. 한 후배가 저를 마치 종 부리듯 부려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명색이 회장인 저는 참고 또 참았습니다. 겉으로는 끝까지 참고 최선을 다해 섬겨주었지만 속으로는 “내가 네 종이냐. 두고 보자”며 투덜거렸습니다. 그 후배는 제게 찍혀도 단단히 찍혔습니다. 그런데 저도 다른 사람에게 찍힌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대학부 회장 때 모든 일에 노파심 혹은 자신의 소신을 관철시키기 위해 앞에서는 잔소리, 뒤에서는 조정하려 하시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혈기왕성하고 회장 경험이 많았지만 미성숙했던 저는 그 선생님의 개입이 그리 달갑지 않아 이의를 제기함으로 그 선생님께 ‘괘씸죄’로 걸렸습니다. 후배를 ‘괘씸죄’로 걸었던 제가 선생님께는 ‘괘씸죄’로 걸렸던 것입니다. 걸고 걸리고…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괘씸죄’란 ‘아랫사람이 윗사람 혹은 권력자의 의도에 거슬리거나 눈 밖에 나는 행동을 하여 받는 미움을 비꼬아서 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 죄는 대한민국 법 조항에는 없지만 관계 속에서 실제적으로 존재하고 때로는 법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가진 법 아닌 법(?)입니다. 한 번 걸리면 그 죄 값(?)이 너무나 커서 쉽게 헤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에 따르는 불이익은 물론이고 오랜 고통과 따돌림 그리고 심한 경우에는 죽임을 당하기도 합니다.
한국사회에는 ‘괘씸죄’에 걸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군대에 가겠다고 선언하고는 미 시민권을 취득한 한 연예인은 ‘괘씸죄’에 걸려서 한국 정부로부터 입국 금지를 당했습니다. 한 수영 선수는 ‘괘씸죄’에 걸려서 체육회로부터 올림픽 수상금을 한동안 받지 못했습니다. 반장 엄마가 한 번도 담임선생님을 찾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괘씸죄’에 걸려서 그녀의 아들이 불이익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목사님은 교단 어르신 목사님들에게 ‘괘씸죄’에 걸려서 이단으로 몰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괘씸죄’는 우리 정서에서 가장 용서받기 어려운 죄라는 생각이 듭니다. ‘괘씸죄’는 정당하고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할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주관적인 생각과 느낌에서 비롯될 때가 많습니다. 내 눈에 거슬리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모두 괘씸죄의 대상입니다. 예쁜 척하거나 나보다 예뻐도, 똑똑한 척하거나 나보다 똑똑해도 괘씸죄에 걸립니다. 봉사를 열심히 하면 잘난 척한다고 괘씸죄에 걸리고 봉사를 하지 않으면 이기적이라고 괘씸죄에 걸립니다.
그러면 누구나 쉽게 걸릴 수 있는 ‘괘씸죄’의 처방약은 없을까요? 고민해보니 아무래도 우리의 태도(attitude)에 그 해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신뢰의 관계를 맺는 데는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상대방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능력과 지능보다도 그리고 깊은 영성보다도 태도가 더 중요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진정성 있고 겸손한 태도가 ‘괘씸죄’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고 나 또한 다른 사람들을 ‘괘씸죄’라는 올가미로 얽지 않게 도와주지 않을까요.
학생시절, 저의 문제도 태도였습니다. 후배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겉으로는 참았지만 속으로는 우월감에 빠져있었던 저의 태도가 문제였습니다. 선생님을 마음으로 존경하지 않고 불평불만을 한 저의 태도가 문제였습니다. 다행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저를 방관하지 않으시고 주위 사람들과 환경을 통하여 책망하셨고 회개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여러분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혹시 ‘괘씸죄’라는 마수의 덫을 놓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괘씸죄’라는 미운털이 박히셨습니까? 먼저 나의 태도를 바꾸어야 관계가 풀립니다. 겸손하시고 온유하신 예수님께서 관계 속에 보여주신 그 온화한 ‘태도’로 우리의 마음을 무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배반했던 베드로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그를 대면하셨던 예수님의 태도, 즉 자기를 배신한 제자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의 아름다운 모습을 닮아가고 싶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11:2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