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승훈 목사 (휴스턴 사랑의교회)
필자는 지난 7월 15일부터 2주간의 휴가를 가졌다. 휴가 첫날 가족들과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감명 깊게 불렀던 찬송가사 한 소절이 있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기독교 고전 찬송가중의 하나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에서 다음 소절로 넘어가지 말고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반복적으로 묵상하며 한번 불러보지 않겠는가?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을 소유한자라면 틀림없이 마음의 눈물이 흐를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만난 모든 사람들의 첫 번째 고백이다. 그렇다면 ‘나 같은 죄인’의 표현에 대해 당신은 얼마만큼 인식하고 있는가? 구원에 대해 전적으로 무능한 자신의 죄된 본성과 부족하고 연약한 삶의 발자취들을 돌아보면서 자신에 대해 철저히 절망한 고백 아니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외적형식으로 전락하고 종교생활 정도로 전락하게 되는 주된 원인은 바로 이 자리 ‘나 같은 죄인’의 자리를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나의 죄인 되었던 자리가 얼마나 깊은 절망의 계곡이었는가를 잊어버린다는 것은 마치 심장 빠진 사람과 같은 것이다. 심장이 빠진 사람 그것은 껍데기만 남아 있는 것 아닌가? 심장이 빠진 껍데기는 모두 다 죽은 것이다. ‘나 같은 죄인’의 자리를 잊어버린 채 진행되는 기독교적 모든 활동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활동이 되고 말 것이다. 늘 반복하여 언급하지만 기독교는 익숙해져 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기독교에 입문하여 교회생활을 어느 정도 해가다보면 설교자의 설교에 대해서도 익숙해져가고 교회정치에 대해서도 익숙해져가고 교회 윤리와 도덕에 대해서도 익숙해져간다. 그러나 머리와 입술에서는 익숙해져 가지만 마음에서는 처음보다 점점 더 병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영혼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감사하게 하는 새싹 같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감동과 감격은 사라지고 둔탁하고 어둡고 불만족스런 옛 자아의 목소리만 가득 차게 된다. 누구나 다 이 자리에 내려갈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혹 그 자리에 내려가더라도 너무 오래 머물지는 말라. 너무 오래 머물러 있으면 당신의 영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메말라 가게 될 것이다. 어떤 환경 혹은 어느 누가 당신을 그 자리에 오래 머물도록 하였다고 생각하는가? 어떤 환경을 지목하겠는가? 어느 누구를 지목하겠는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그 어떤 환경도 그 어느 누구도 아니다. 바로 당신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나 같은 죄인’의 위치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필자는 가정예배를 드리며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을 여러 번 반복하여 부르면서 마음의 깊은 눈물을 경험하였다. 지금 현재 이 자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감사하고 고맙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가사를 마음속 깊이에 담지 못하고 단지 입술로만 부르며 그 다음 가사로 마치 교과서 진도 나가듯이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예배의 출발과 찬송의 출발과 섬김의 출발과 봉사의 출발과 윤리와 도덕의 출발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고백이다. 오늘도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하여 참되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보라. 당신 안에 참된 신앙고백의 눈물과 함께 그리스도의 주권적 은혜에 대해 잃어버린 감격과 감동을 되찾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