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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받으라

여승훈 목사

지구촌 곳곳에서는 매일 사건과 사고들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고 휘청거리고 있다.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하는 것은 단순히 일어난 상황에 대한 놀라움 때문만은 아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현실 세계에 소망을 걸어 두었던 사상이 실제적인 이유이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현실세계에 대한 소망은 모든 것이 눈에 보기에 잘되고 귀로 듣기에 잘되고 감각적으로 느끼기에 잘되는 것에 둔다. 이런 관점을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을 많이 소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 이해하였고 반대로 땅과 가진 소유가 적은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이해하였다. 가난하면 저주이고 부유하면 복이다 라는 사상이다. 이런 유대 사회의 복에 대한 이해를 예수님께서 한순간에 깨뜨려 버리는 사건이 있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지상 첫 번째 설교인 ‘팔복 시리즈’를 통해서 ‘복’에 대한 참된 개념을 가르쳐 주셨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 유대인들이 저주라고 여기던 가난에 대해서 예수님은 그것이 곧 복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유대 사회의 통념을 일시에 뒤집어엎는 매우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가난한자의 복과 같은 맥락의 복을 구약의 시편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복있는 사람은....”(시1:1). 여기서 말한 ‘복’은 히브리어로 ‘아솨르’라는 단어로 그 의미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 가운데서 순종함으로 주어지는 보상으로 ‘번영하다’라는 뜻이다.

‘번영하다’ 물질세계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금새 알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단어가 예수님의 첫 번째 설교에서 사용하신 ‘복’이라는 단어의 ‘마카리오스’로 번역되었다. 시편 1편 1절의 ‘복’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이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카리오스(복)의 의미는 ‘하나님나라에 참여하므로 누리는 즐거움’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의 흐름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2:17). 먹고 마시는 것, 절기, 월삭, 안식일은 구약의 율법을 대표하는 내용이다. 즉 구약은 그림자의 역할이다. ‘몸은’ 이 말은 ‘실체는’ ‘완성은’ 그런 의미이다. 즉 구약은 그림자이고 그 구약의 실체는 그리스도이시라는 뜻이다. 시편 1편의 복(아솨르)이 비록 번영하다의 의미를 가졌어도 그것이 실체(완성)가 아니고 그 복이 가리키는 실체(완성)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복의 실체인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나라인 하나님나라에 참여하는 그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생활 속에서 누리는 물질적 환경들이 하나님의 복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포괄적으로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에 포함이 된다. 그런데 복의 실체(핵심, 본질)는 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복의 실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다스리고 통치하는 하나님나라에 있다는 것이다. 비록 물질로 풍요롭다 하더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나라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다. 반면에 비록 물질이 빈곤하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다스림을 받으며 하나님나라의 즐거움을 가족들이 누리며 산다면 그것이 곧 진짜 복이라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하나님나라의 즐거움 즉 진짜 복을 추구할 때, 물질이 풍부해도 그분께 감사를 드리고 물질이 빈곤하여도 좌절하지 않고 빈곤한 중에 그분의 섭리가 있음을 신뢰하고 또한 빈곤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진짜 복인 주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하나님나라의 즐거움을 더욱 깊이 알아가게 하여 주심에 감사드리게 된다. 반면에 물질세계의 번영이 곧 복의 표준이 되어버린다면 물질이 넉넉하면 복 받은 것이라 생각하여 흥이 나게 살지만 물질이 빈곤해지면 복이 떠나갔다는 생각이 들면서 좌절하고 절망하며 죽지 못해 사는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분명히 아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절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빈곤하다고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빈곤으로 말미암아 더욱 깊이 알아가는 하나님나라의 즐거움 때문에 더욱 당당하고 더욱 여유있게 된다. 이런 것이 세상 사람들이 충격 받는 진실한 믿음 아니겠는가? 잘될 때 좋아하고 안될 때 절망하는 것은 기독교 바깥에 머물고 있는 세상 사람들도 할 줄 아는 것 아닌가? 그것은 믿음과 관계없이 사람의 본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눈앞에 일어나고 있는 빈곤한 상황들로 인하여 결코 실망할 필요가 없다. 그 이유는 이렇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전5:7).

실망하지 않는 이유는 보는 것에 소망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눈에 보는 것에 소망을 두면 그것은 곧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면 일이 뜻대로 잘 안되거나 막히게 되면 실망하고 절망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이 롬8:25에서 매우 의미있는 말을 하였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보지 못하는 것 즉 주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하나님나라에 참여하므로 누리는 즐거움을 소망으로 삼는다면 참음으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참음이라는 것은 자신의 의지력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내 의지력은 참는데 한계가 있다. 절대 오랫동안 참지 못한다. 바울이 참으라고 호소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망의 근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에게 일어난 2000년 전의 사건(십자가, 부활)을 지속적으로 집중하고 붙잡으라는 의미이다.

당신의 인내력을 테스트하지 말라. 시험 들기 쉽다. 시간문제이지 한계가 반드시 찾아온다. 참는 것은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묵상하고 매어 달리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국 내가 참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의 은혜와 능력이 당신으로 하여금 참아내게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참는 것도 전적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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