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승훈 목사
요즘은 사라졌지만 그 옛날 어린 시절 추억의 놀이 가운데 한가지 “구슬치기”가 기억난다. 약간 추운 겨울날 양지바르고 평평한 곳에서 동네 아이들이 구슬치기를 즐겼었다. 한참 구슬치기를 하다가 나중에는 한쪽으로 모여 앉아서 “짤짤이”를 한다. 짤짤이는 두 주먹 속에 구슬를 넣고 흔들 때 나는 소리 때문에 부쳐진 이름이다. 짤짤이를 하면 일반 구슬치기 할 때보다 판이 커진다. 가지고 있던 구슬를 다 잃어버리면 집으로 달려가서 부모님으로부터 돈을 받아서 구슬를 사와서 다시 한다. 어느 정도 잃으면 멈출 법도 한데 그렇지 않다. 이유는 최소한 “본전치기”를 해야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자, 여기서 “본전치기”라는 말의 의미는 이익과 손해가 평행을 이룬다는 뜻이다. 수치로 따지면 제로다. 쉽게 말해서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짤짤이를 하다가 잃으면 본전생각 때문에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하게 된다. 이것이 나중에 더 큰 잃음을 초래하게 되는데도 말이다. 본전 생각에 인생 낭패 보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 것 같다. 필자가 알고 있는 어떤 분은 자신이 잃어버린 재물과 평판들로 인하여 오랜 세월 고통스럽게 지내왔다. 최소한 본전은 찾아야 된다는 생각에 사람들과의 얽히고 섥힌 복잡한 문제들을 내려놓지 못한다. 항상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손해 보았다고 생각하고 모함을 당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그분 스스로 더욱 힘들어지게 하고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주요 요인이 되고 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해마다 밀 20만 섬을 수확할 수 있는 농지를 유산으로 물려받은 부자였다. 그러나 엄청난 “부”를 유산으로 물려받은 것과는 달리 톨스토이는 매우 간소한 삶을 살았다. 이로 인해 생긴 아내와의 불화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집을 떠난 며칠뒤 폐렴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톨스토이가 생애 마지막에 남긴 한마디 유언은 “하늘이 꾸미신 그대로 거두라”였다. 또한 톨스토이는 죽기 며칠 전인 191년 1월 1일에 자신의 딸 샤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글을 썼다. “하나님은 한계가 없으시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이해할 뿐이다. 진리는 오직 하나님께 존재한다…” 톨스토이의 말을 되새기다 보면 “본전치기” 생각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조금은 부끄러워진다. 본전치기 생각의 오해의 뿌리를 톨스토이의 한마디 말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이해할 뿐이다”. 그렇다 하나님께 대한 부분적인 이해가 결국 하나님께 대한 오해를 가지게 되고 그 오해가 자신의 상황에 대한 오해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모든 인생들이 가진 소유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구약성경 욥기서의 핵심 인물로 등장하는 욥의 고백으로부터 들어보자.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신 자도 여호와 시니…”(욥1:21).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분적으로만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공급해주시는 분으로만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간증집회에서 종종 듣게 되는 내용은 하나님이 이것을 주시고 저것을 주시고 하나님이 이것을 해결해주시고 저것을 해결해주셔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런 간증의 내용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은 덥석 인정을 하면서 걷어 가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경이 증거 하고 있는 하나님은 공급해주시기도 하시는 분이시고 동시에 걷어 가시기도 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주권의 신학에 대해서 아느냐 모르느냐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의 신학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이 현재 당신이 만나고 있는 고난의 상황 속에서 실제로 효력이 나타날 만큼 적용이 되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많은 분들이 고민이 되리라 본다. 결국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지식으로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서 실제로 마음으로 체험되어지고 고백되어지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것을 포함한다. 진실로 하나님의 주권 신학이 마음으로 경험되어졌다면 하나님께서 걷어 가신 소유들에 대해서 받아들임이 일어날 것이다. 현재 일어난 일들 속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그 상황을 받아들임이 일어날 때 고난의 깊은 터널을 빠져나갈 돌파구가 열리는 것이다. 많은 분들이 일어난 상황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돌파구를 만들지 못해서 그 많은 시간 고통스러워하고 복수에 대한 악한 감정으로 용서하지 못하여 인생을 허송세월 낭비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모든 소유의 유무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이루어졌음을 인정하므로 고난의 깊은 터널을 빠져나갈 돌파구가 열렸다면 이제는 그 돌파구를 통해서 마음껏 활개를 치면서 달려가게 하는 중요한 고백이 한 가지 있다. 이 또한 욥의 고백이다. “내가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져온 것 없었으니 죽을 때에도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리라”(욥1:21). 무슨 말인가?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져온 것 없고 죽을 때에도 아무것도 가져갈 것이 없으면 수치로 따지면 제로다. 아무것도 없음의 상태다. 이것이 모든 인생들의 본전이다. 인생의 본전이 아무것도 없음인데 무엇을 손해보고 무엇을 잃어 버렸다고 말하겠는가? 문제는 손해본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잃어버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생의 본전이 원래 아무것도 없음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진짜 문제라고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잃어버린 것과 손해본 것에 대해서 본전치기 생각으로 인해 상처 받고 실망하고 좌절하고 방황하고 있다면 지금 현재 잃어버린 그 상태가 곧 본전치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두움의 굴레로부터 속히 빠져 나와서 창공을 향해 마음껏 날개 짓을 하라. 만약 당신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다면 그 어떤 경우에라도 당신의 인생은 잃어버리거나 손해본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라. 성경에서 매우 파워풀한 말씀구절 하나를 소개해 보겠다. “비록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신뢰 할 것이다…” “Though God slay me, I will hope(trust) in Him…”(욥13:15). 아, 정말 얼마나 파워풀한 말씀인가? 죽이실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것 그것은 그동안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신 무엇에 믿음의 고리를 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의 인격 자체에 믿음의 고리를 걸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각으로 본전치기를 하려고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진 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아무것도 없음의 본전의 자리를 돌아가서 마음으로 받아들여보라 그러면 영혼의 자유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