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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윤리학(2)

이길호 목사 (뉴욕 성실장로교회 원로)

III. 율법과 복음 (Law and Gospel)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off)와 같은 개혁 신학자들은 성경이 율법과 복음이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구약은 율법, 신약은 복음으로 구별된 2 가지의 성경의 주제가 있다고 오해 한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율법과 복음은 신,구약 전체에 걸쳐 모든 성경안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구약에도 율법과 복음이 있고, 신약에도 율법과 복음이 있다. 율법은 인간의 마음속에 죄를 상기 시킴으로 회개를 일깨우고,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구원의 믿음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 율법과 복음 모두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즉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도한다. 율법과 복음이 서로 대조되거나 대치되는 것은 아니다. 율법에도 복음의 약속이 있으며, 복음에도 율법적인 요구가 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인 반면(창세기 2:17; 출애굽기 20:1-18 참조),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값없이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다는 좋은 소식이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처음으로 계시하셨고 (창 2:17),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두 돌판에 기록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언약으로 선포하셨다 (출 20:1-18).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이다. 이 복음의 계시는 처음 창세기 3장 15절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저주에서 구원하고, 앞으로 구속자가 오셔서  사탄을 멸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시작되었고, 요한 계시록에서 최후의 심판을 통해 마귀를 박멸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에게 영원한 천국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약속으로 그 절정을 이룬다 (계 22:3).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를 에덴에 두셨을 때, 아담은 하나님과 언약관계 (행위언약)에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들은 아담의 후손 모두의 마음에 기록되어 있었다 (로마서 2:12-16). 그러나 더욱 명확하고 정확한 하나님의 계명을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문자로 기록하여 영원히 간직하여 지키도록 하셨다.  이 시내산 언약 (모세의 언약) 속에서 율법과 복음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을 때, 지금까지 내면, 즉 사람의 마음에 기록된 것을 이제는 모든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문자로 기록했고, 보고 순종하도록 했다. 

십계명을 “도덕법” (moral law)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마음에 심어 주신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보편적인 지식 (universal knowledge of God’s will)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 계명에 순종하지 않으면 언약의 저주 (covenant curses) 가 내려진다. 계명 하나라도 지키지 아니하면 이 모든 계명을 범하는 죄가 된다(야고보서 2:10).

모세의 언약속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가운데 임재하실 곳  (출 25:9) 성막을 세우게 하셨고, 모세를 언약의 중보자로 세우셨으며 (출 3:15), 그리고 제사장의 직분을 세우시고. 동물 희생을 드리게 하셔서 속죄의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앞으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예표한다 (히브리서 8:1-13). 

계명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들의 죄를 보여 주는 동시에 (갈라디아서 3:10-14), 그들의 메시아요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시키는 역할을 한다.

바울이 말했듯이,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로마서 3:20). 반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구원의 메시지이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죄책과 그 결과로 부터(from the guilt and consequences of their sin) 구원하기 위해 행하신 모든 일을 선포하는 것이다 (로마서 10:14-17). 우리는 복음을 “행”하지 않고,  복음을 “믿는다” (We do not “do” the gospel. We “believe” the gospel).

어떤 기독교 진영은 율법과 복음을 서로 대립된 개념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구약은 율법시대이며, 신약은 복음의 시대이며, 신약시대에는 율법은 무효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율법을 충족시켜 주셨기 때문에 신약의 신자들은 율법과 관계가 없다는 의미이다. 이들이 극단적으로 나아가면 율법폐기주의자들이 (antinomianism) 된다.

종교개혁 사상의 기본은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부인하지 않았다. 존 칼빈(John Calvin)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율법의 중요성을 보여주기 위해 “율법의 삼중 사용” (Threefold Use of the Law) 의 글을 썼다(기독교강요 2.1).

율법의 첫 번째 역할은 거울 (mirror)의 역할이다. 율법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가르쳐주며, 동시에 인간의 죄성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준다. 어거스틴은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려고 노력한 후에, 율법 아래서 우리의 연약함을 느낀 후에 은혜의 도움을 간구하는 법을 배우도록 명한다 ”(기독교강요 2.7.9) 라고 했다. 율법은 우리의 약점과 죄를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우리의 죄와 연약함을 해결해 주시며, 능력의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한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선생의 역할을 한다 (갈 3:24).

율법의 두 번째 역할은 불법과 악을 억제하는 역할이다 (the restraint of evil).  칼빈은 이 역할이 “두려운 비난과 그에 따른 형벌의 두려움을 통해, 정의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을 억제한다” (기독교강요 2.7.10)고 말했다. 율법은 최후 심판이 실현될 때까지 이 땅에 제한된 정의의 척도가 된다 (a limited measure of justice).   

율법의 셋째 역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율법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의 규범이 된다 (normative function).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기뻐하시는 것처럼 율법을 기뻐한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말씀하셨다. 율법은 성화의 방편이 된다.

율법의 제 3의 역할은 성도들의 삶의 원칙(principle use)이 된다 (Inst. 2.7.12).  칼빈은 율법의 제 3의 역할을 두 가지로 나누면서, 먼저 도덕법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며,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권고한다.  칼빈은 다윗이 시편 19편과 119편에서 이와같은 이유로 율법을 찬양한다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율법과 복음에 대한 잘못된 2가지 견해는 율법주의 (legalism)와 율법폐기주의 (Antinomianism) 이다.

율법주의는 What is Legalism?  간단하게 말하면, 율법주의는 우리가 행하는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얻거나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것이다 (we can earn or keep God’s favor by what we do). 그리고 사람이 선한 일을 하거나 율법을 순종함으로써 구원을 얻고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주장이다.

율법주의의 문제는 인간의 의로운 행위를 내세운다. 율법주의는 “내가 하고, 혹은 내가 하지 않는다” (I do or do not do) 라고 주장하며, 복음은 “나는 할 수 없고, 예수께서 다 하셨다” (I can’t do, but Jesus did) 한다. 

율법주의는 자신의 의로움과 공로를 하나님께 내세우려고한다. 이들은 항상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나아간다. 이들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행위와 공로를 의지한다.

율법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완전한 의(sufficient righteousness )를 축소 시킨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역의 충분성 (sufficiency)을 인정하지 아니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에 자신들의 선행과 공로를 첨가 시킨다.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의 충분성을 믿지 아니한다. 

어떤 일에 개인적인 공로에 집착하는 것은(그것들이 아무리 선하거나 성경적으로 보일지라도) 예수님을 그의 최고 위치에서 축소시키는 것이다.

율법주의는 매우 위험한 사상이다.  양들은 상처를 입고, 복음은 가려지고, 그리스도는 소외되고, 인간은 높아져 교만하게 된다.  

갈라디아서 5:20-21,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통해 율법주의자들을 밝혀주셨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 곧 강도나 행악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하니라”고 담대히 하나님께 감사하며 금식과 십일조에 자신의 공로를 내세웠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리는 멀리 서서 머리도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했다. 

예수님은 자신의 선행과 공로를 자랑하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주님께  자비를 구한 세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받아 집으로 돌아간 자”라고 하셨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에베소서 2장 8-9절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갈라디아서 3장 10-11절,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과 같으니라. 율법에 속한 자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함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였느니라.”

KHL0206@gmail.com

09.28.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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