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두렵도다, 이곳이여!

지나친 욕심 때문에 부모님과 고향을 등지고 도망자의 길을 가야만 했던 야곱이, 정처 없이 헤매다가 다다른 곳이 브엘세바에서 하란으로 가는 빈들이었다. 해는 어느덧 서쪽으로 기울고 온 누리는 어두움의 장막으로 덮이는데, 피곤한 나그네는 돌을 베개로 잠을 청하고 있다. 적막하고 고독한 밤이 익숙해지는 즈음에, 꿈인 듯 생시인 듯한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사닥다리가 내려와 지상에서 하늘로 세워지고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닥다리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 28:16-17)

야곱이 지금까지 아버지 이삭에게 말로만 듣던 그 하나님을 이제 두 눈으로 보게 되었다. 지금까지 관념 속에 갇혀 있던 하나님이 생생한 현장에 실존적으로 나타나셨다. 지금까지 말로만 듣던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게 된 야곱은 먼저 두려움이 앞섰다. 야곱은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가?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이 거짓과 속임수의 연속이었기 때문일까? 야곱은 자기의 출생의 순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는 경쟁의식과 쟁취의 집념으로 살아오지 않았나 생각되었다. 야곱은 어떤 강한 성취욕의 노예가 되어 일종의 도박을 하며 살았다고 생각되었다. 그것이 비록 하나님의 거룩한 복을 얻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할지라도. 형 에서와의 도박에서 장자 권한을 빼앗고, 아버지 이삭과의 도박에서 하나님의 복을 사취하고, 마침내 외로운 방랑자가 되어서 정처 없이 고향을 떠나 광야를 방황하고 있다. 속임수와 거짓된 생활에는 반드시 두려움과 고난이 수반된다는 사실을 야곱이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을지라도.

야곱이 아무런 마음의 준비가 없이 돌연히 하나님을 만나고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돌베개하고 누워있는 바로 그곳이 하나님께서 계신 공간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무지는 두려움을 가져온다. 인간이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이 두려워진다. 내가 너를 모르면 너는 나에게 두려움의 존재가 된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두려워진다.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아도 너는 나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니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느니라”(요일 4:18) 무지는 두려움이요, 불신앙이다. 무지는 걱정과 근심을 가져온다. 반면에 사랑은 즐거움이요, 믿음이다. 사랑은 기쁨과 행복을 가져온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야곱은 비로소 하나님에게 대한 신뢰와 경외심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까지 야곱의 생애는 사행심과 속임수의 연속이었다. 인간이 사행심과 속임수를 가지고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 인간과 하나님을 신뢰하는 참다운 믿음에서만이 인간은 행복할 수 있다. 야곱에게 또 하나의 놀라운 발견은 ‘하늘의 문’이었다. 문이라고 하는 것은 이쪽의 공간에서 저쪽의 공간으로 옮겨가는 통로이다. 이 문은 절망에서 소망으로, 미움에서 사랑으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현세에서 내세로 나가는 길이다. 이러한 문의 발견은 놀라운 축복이다.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라고 야곱이 고백하였다.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내 마음을 괴롭힐 때, 미움이 내 마음에 있을 때, 절망이 나를 사로잡을 때, 죽음의 공포가 나를 휩쌀 때, 저주가 내 마음에서 돋아날 때 그곳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그곳에 열린 하늘 문을 발견하고, 그 문으로 들어가 새롭고 활기에 넘치는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02.03.2024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