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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입장에서 현대신학 비판 (2)

이길호 목사

(뉴욕 성실장로교회 원로)

I. 칼 바르트 (Karl Barth)와 신정통주의 (Neo-orthodoxy) (2)

 

(1) 바르트와 신정통주의 성경관  

 

 신정통주의 신학자 바르트와 브루너 (Barth and Brunner)는 성경을 객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인했다. 그들은 성경이 기껏해야 인간 문서의 모음집에 불과하다 (a collection of merely human documents)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인간 문서를 사용하여 독자와의 “만남” (encounter)을 일으키심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the Bible becomes the Word of God)고 한다. 그러나 성경 그 자체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성경이 모든 면에서 객관적으로 사실임을 믿고 고백하는 동시에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동시에 성경과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만남을 갖는다는 이 두 가지를 서로 대립시킬 필요가 없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임을 받아들이든, 안 받아들이든 인간의 태도와 상관없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인간의 지지와 증명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가진다(the self-attestation of Scripture).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4에서, “믿고 순종해야 할 성경의 권위는 어떤 사람이나 교회의 증언에 달려 있지 않다. 오직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The authority of the Holy Scripture, for which it ought to be believed, and obeyed, depends not upon the testimony of any man, or Church; but wholly upon God (who is truth itself) the author thereof: and therefore, it is to be received, because it is the Word of God).

칼 바르트는 이전 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을 반대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은 초자연적 하나님의 계시를 부인한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신정통주의 신학을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 (The theology of the Word of God)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바르트의 신정통신학을 오해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개혁주의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통 개혁주의 언어를 완전히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Barth does use Reformed language but he means something totally different).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강조하지만, 그러나 성경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이며,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인한다. 바르트는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성경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한다 (Scripture merely witnesses to the Word of God)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은 성경의 무오성과 무흠성을 (inerrancy and infallibility) 부정한다. 그들에 의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는 사건의 간접적인 매체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에 관한 어떤 명제도 가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경계는 너무나 커서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며, 이 만남은 신비적이기 때문에, 명제적으로 묘사되거나,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만남은 주관적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다. (Encounters with Jesus Christ, the revelation of God, is but mystical, not something describable propositionally, for the encounter is subjective and ineffable).

바르트의 변증법적인 계시관에 의하면, 우리 주님은 피조물안으로 들어올수 없는 계시이시며, 이 계시는 마치 접선과 같아서 단순하게 원에 접촉하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원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것과 같다 (Our Lord is the revelation that never truly enter creation, but merely touches us as a tangent touches a circle – that is without truly touching it).

로마서 주석에서 바르트는 “로마서는 미지의 하나님 (the unknown God)에 대한 계시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찾아오시기로 작정하셨지, 사람이 하나님께로 갈 수 없다. 계시가 있은 후에도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항상 미지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했다. 바르트은 항상 하나님의 초월성 (God’s transcendence)을 강조한다.

 

(2) 바르트의 두가지 역사영역

 

바르트는 특별한 종류의 역사 개념을 근거로 해서 신학을 세웠다. 즉 연대기 (chronological)로 설명할 수 있는 사실적인 역사 (Historie)와 역사를 초월하는 의미로서의 역사(geschichte)를 나누고 의미로서의 역사를 신학의 기초로 삼았다.

바르트는 그리스도를 설명하면서 한편으로는 우리 주님의 생명이 우리의 육안으로 관찰되어질 수 없으며(geschichte), 다른 한편으로 부활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이 실제로 비어 있는(Historie) 예수님을 나누어서 설명했다. 바르트의 변증법에 의하면 우리 주님은 결코 역사(Historie)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셨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초역사적인 역사에서 (Geschichte) 다시 부활하셨다. 

박윤선 박사는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바르트가 역사의 차원을 두가지 영역으로 나누는 것은 플라톤적 이분법적 이해이며 이것은 성경에 합치하지 않은 사고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역사 이해는 성경의 계시를 사실적 사건의 역사차원에서 실존적 해석의 (특히 키에르키고르의 실존주의) 차원으로 평가절하 하는 것이다” 올바로 평가했다. 박윤선 박사는 계속해서 바르트의 초절주의(transcendentalism)적 계시관을 바빙크의 말을 인용하면서 비판한다 (“하나님의 구원운동은 세상을 초월하는 초절주의적이 아니라, 온 인류와 세계에 깊히 참여하여 역사하신다”).

그리고 박윤선 박사는 다음과 같이 정통 개혁주의 계시관을 주장한다: “하나님은 만물을 초월하신 분 (the transcendence of God)으로서 창조주이시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무한하신 사랑으로 역사계에 들어오셔서 피조물인 우리와 만나 주시고 우리에게 자신을 보이실 수 있다 (하나님의 내재성, The immanence of God).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만물자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만물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명확하게 구분한다.” 

박윤선 박사는 하나님과 만물을 구분하는 점에서 범신론을 배격하면서도, 초월적인 하나님께서 동시에 피조물속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성경적인 개념이다.

 

(3) 일반계시를 부정하는 바르트

 

바르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계시가 유일한 계시라고 주장하면서, 자연계시라는 또 하나의 독립적인 계시가 있을 수 없다” 주장했고 “자연계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려줄 정도이기 때문에, 그런 지식은 하나님의 성품의 단일성을 분열시키며, 따라서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바르트는 “창조에 대한 역사적 계시, 곧 시간과 공간계의 계시(피조물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지식)는 명백하게 계시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하여 박윤선 박사는 바빙크를 인용하면서 자연계시 (일반계시)를 이렇게 설명한다: “개혁주의 신학은 피조물들 자체를 가리켜 ‘일반계시 또는 자연계시’라고 부른다. 칼빈주의자 바빙크는 일반계시나 특별계시는 분명하게 하나님을 보여주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 자신의 반대를 물리치고 그 증거를 받아야 된다고 했다.”

일반계시 (자연계시)에 관하여 바르트와 브루너(Emil Brunner)의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부루너는 일반계시를 긍정적인 입장을 취했고, 그러나 비해 바르트는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부루너는 인간이 자연계시 (일반계시)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다. 부루너에 의하면 자연계시는 우리 인간에게 그리스도안에 있는 구원의 길은 가르쳐 주지는 않고, 다만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여기에 대해 바르트는 부루너의 주장에 답변하면서 [Nein! Antwort an Emil Brunner] (“No! 부루너에 대한 대답,” 1946) 이란 책을 통해서 부루너의 입장을 반박했다. 바르트는 인간이 타락함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형상이 완전히 파괴되었기 때문에 자연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바르트는 일반(자연) 계시를 전적으로 부인하면서, 오직 하나의 계시는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참된 계시이다. 이에 대해 부루너는 하나님의 창조는 계시이며, 인간도 하나님의 창조물이므로 하나님의 계시이다. 자연계시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죄에 의해 크게 왜곡되었지만, 그러나 완전히 파괴되어지지는 않았다 (distorted and twisted, not totally destroyed)라고 주장한다. 그는 자연계시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초보적인 단계의 하나님의 인식의 가능성은 있다고 주장하였다. 바르트와 부루너의 자연계시에 대한 견해의 차이는 아래와 같다.

바르트: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부루너: 죄로 말미암아 인간안의 하나님의 형상의 부서지고 왜곡되어졌지만, 그러나 완전히 전적으로 파괴되지 아니하였다.

바르트: 일반 계시가 있다는 주장은 거부되어야 한다. 오직 하나의 온전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부루너: 세계는 창조물인 동시에 계시이며 하나님의 자기 전달이다. 그러므로 자연을 통해서 우리는 어느정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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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0.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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