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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에게 영향을 준 작가 2 G. K. 체스터턴

강태광 목사

 (시인, 칼럼니스트)

           World Share USA 대표

C. S. 루이스가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신앙 변증가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루이스는 다양한 저술 활동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의 작품은 많은 신앙인에게 신앙의 깊이와 넓이를 더하고 있습니다. 루이스는 현재에도 베스트 셀러 작가입니다. 이런 루이스가 신앙인과 저술가로 성장하는 과정에 G. K. 체스터턴(Gilbert Keith Chesterton) 영향을 받은 것은 주목해야 할 사실입니다. 

영국은 20세기에 걸출한 기독교 변증가를 배출했습니다. 20C 후반은 세계 복음주의 운동(Evangelical Movement)을 이끈 존 스타트가 활동했습니다. 중반에는 C. S. 루이스가 활동했고 20세기 초반은 두 사람에게 기독교 문학과 저술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 길버트 체스터턴(Gilbert Keith Chesterton)이 활동했습니다.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체스터턴은 C. S. 루이스의 회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당대에 유명한 기독교 변증가였습니다.      

체스터턴은 1874년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슬레이드 예술학교와 런던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각각 미술과 문학을 전공하고 젊은 나이에 작가가 되었고 문학 경력을 쌓았습니다. 체스터턴의 필력은 기자로 빛을 보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저널리스트로 성공하기를 희망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문학적으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걸출한 시인이며 수필가, 희곡 작가, 소설가였고 사회와 문학을 날카롭게 비판했던 탁월한 비평가였습니다. 그는 수백 편의 시, 다섯 편의 희곡, 다섯 권의 장편 소설, 환상소설을 비롯해 단편소설 200편을 발표했던 걸출한 작가였습니다. 

체스터턴은 당대에 영국 사회의 유명인사였습니다. 그는 20세기 전반 영국의 공론장을 쥐락펴락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능한 진행자였고 탁월한 언론인이었던 체스터턴은 시사 토론으로 명성이 높았던 논객이었습니다. 역설의 대가로 불릴 만큼 재기 넘치는 경구를 잘 구사했다고 알려집니다. 

체스터턴은 자신의 변증적 전략을 귀류법이라고 불렀습니다. 귀류법은 자신의 명제에 반대 명제를 전제로 추론을 전개합니다. 그리고, 그 추론의 결과가 오류임을 밝히면서 자신의 명제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체스터턴이 반기독교적인 서적을 탐독하다가 그들 논리의 허점을 발견하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돌아온 경험을 반영한 것입니다. 

필립 얀시에 따르면 무인도에 표류하면 무슨 책을 가져가길 바라느냐는 질문에 체스터턴은 ‘배 만들기 안내서’라고 대답했었다고 합니다. 체스터턴을 생각할 때 그의 대표적인 라이벌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조지 버나드입니다. 버나드 쇼와 비슷한 영향력을 가지고 기독교 입장을 대변하는 변증가였습니다. 그는 버나드 쇼의 진보적이고 반기독교적인 입장을 비판했습니다. 

체스터턴은 정통신앙에 대한 오해를 정리하면서 기독교를 변증합니다. 흔히 정통주의라는 단어에 엄격하고 딱딱한 교리를 강조하는 듯합니다. 정통을 고루한 것으로 여기는 대중적 견해에 대해 체스터턴은 정통신앙을 인생의 모험과 로맨스의 원천으로 제시합니다. 

체스터턴이 지금 주목을 받는 이유는 C. S. 루이스 회심에 강력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루이스가 영향을 받게 된 체스터턴의 책은 “정통”과 “영원한 사람”으로 둘다 기독교 변증서입니다. 방황하던 C. S. 루이스가 자신의 영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체스터턴이 안내한 것으로 보입니다.

체스터턴은 루이스와 비슷한 신앙의 여정을 가졌습니다. 체스터턴은 루이스처럼 어린 시절에 신앙을 잃었다가 신앙을 회복하였습니다. 체스터턴 스스로 밝히기를 열두 살 때 이방인이었고 열여섯 살에 이르러는 완전한 불가지론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반기독교적 사상이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탐닉하던 중 비판자들 안에 내재한 의심과 절망을 포착했고 그로 인해 기독교로 회심했습니다. 그는 “나를 정통신앙으로 돌아가게 한 것은 헉슬리와 허버트 스펜서와 찰스 브래들로와 같은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나의 의심에 대한 의심을 심어주었다.”라고 했습니다.

언론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체스터턴은 1900년에 두 권의 시집을 낸 이후로 문학가로 또 평론가로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정치와 사회 비평가로 활발하게 활동했고 로버트 브라우닝, 찰스 디킨스, 조지 버나드 쇼 등에 대한 문학비평 분야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1922년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정통 신앙인 관점에서 유능한 변증가로 활약했습니다.

 많은 작가가 체스터턴을 따르고 칭송했습니다. T.S.엘리엇은 "체스터턴은 영원토록 후대의 존경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라고 칭송했고, 버나드 쇼는 "세상이 체스터턴에 대한 감사의 말에 인색하다"라고 했습니다. 20세기 위대한 소설가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체스터턴을, "에드거 앨런 포보다 더 훌륭한 추리 소설가"라 했습니다.

체스터턴은 기독교 신앙을 갖기 전에 다양한 종교와 이단을 섭렵했습니다. 강신술(Spiritualism), 신지학(Theosophy), 그리고 20세기에 유행했던 대부분의 이단을 거쳤습니다. 그 와중에 기독교를 반대하는 서적들을 탐독하다 그들의 논리에 허점을 발견하고 신앙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신실한 성공회 신자 프랜스 브록(Frances Brogg)을 만난 것은 축복이었습니다.

체스터턴은 신앙인이 된 후 클래리온(Clarion)이라는 신문사의 요청으로 자신의 신앙을 소개하는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당시 클래리온의 편집장 로버트 블랫츠포드(Robert Blatchford)는 매주 다양한 사람의 신앙소개 글을 실었습니다. 체스터턴은 세 개의 칼럼으로 기독교 세계관을 소개하며 기독교의 합리성을 논증했습니다. 이글을 계기로 그는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Kangtg1207@gmail.com

08.19.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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