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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대학 생활

강태광 목사

 (시인, 칼럼니스트)

           World Share USA 대표

1차 대전이 종료하자 전쟁에 참전했던 많은 옥스퍼드 학생들이 복학하기 시작했습니다. C. S. 루이스도 서둘러 학교로 돌아와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루이스는 이때부터 학자가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루이스의 전기를 쓴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주장합니다. 맥스래스 박사의 주장에 일리가 있는 것은 학자가 되기 위해 필수인 고전어와 고전 문학을 공부하였습니다. 

루이스는 일찍이 몰번 재학 시절에 고전어를 공부했습니다. 당시 운동에 재능과 취미가 없었던 루이스는 도서관을 피난처로 삼아 책과 살았습니다. 그 시절 루이스는 고전 담당 교사 웨이클린 스미스 (Harry Wakelyn Smith)와 친해지면서 고전어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스미스는 루이스에게 라틴어를 가르쳤고, 스미스의 도움으로 루이스는 그리스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했습니다. 

나아가 루이스는 커크패트릭 선생으로부터 고전어 공부의 심화학습을 했습니다. 탁월한 교사였던 커크패트릭은 루이스의 고전어 실력을 칭찬했습니다. 커크패트릭 선생은 루이스를 만난 지 1년이 지난 후에 루이스의 아버지에게 “잭(루이스)은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그리스 희곡을 가장 탁월하게 번역하는 사람입니다.”라고 칭찬했답니다. 루이스는 이미 고전어와 고전 문학을 공부할 준비가 되었던 대학생이었습니다.

루이스는 옥스퍼드 대학교 고전어와 고전 문학 즉 “리테라이 후마니오레스(Literae Humaniores)”를 공부하였습니다. 이 과정은 옥스퍼드 대학교가 자랑하는 코스였습니다. 옥스퍼드 대학교 학문이라는 왕관의 다이아몬드라고 칭해졌습니다. 다시 말해 옥스퍼드 대학교 학부에서 최고의 과정으로 인정받는 고전어와 고전 문학 과정을 루이스가 공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옥스퍼드 대학교 고전어와 고전 문학 심화 과정인 “리테라이 후마니오레스(Literae Humaniores)”는 현대적인 표현을 빌리면 인문학 과정이었습니다. 이 과정을 유명한 고전학자인 윌리엄 아치볼드 스푸너(William Archibald Spooner)는 ‘고대세계의 문명과 사상에 잠기는 것’이라고 요약했답니다. 많은 고전 작품을 강독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라틴어 “리테라이 후마니오레스(Literae Humaniores)”는 번역이 쉽지 않습니다. 문자 그대로 풀면 ‘더 인간적인 학문’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문학(후마니타스/Humanitas)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했던 키케로(Cicero)가 인문학을 ‘인간다움을 만드는 학문’으로 설명했던 것과 일치합니다. 

이 과정은 과거의 지적 문화적 유산에 직접 참여함으로 정신을 확장하고 인생에 대한 통찰력을 얻게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리테라이 후마니오레스(Literae Humaniores)”를 공부하는 옥스퍼드 대학생들은 고전들을 원어로 직접 강독하는 차원 높은 과정이었습니다. 당시 영국 사회와 옥스퍼드 대학의 고전 인문학에 관한 관심이 확인되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리테라이 후마니오레스(Literae Humaniores)”는 단순한 지식 축적이나 학문적 관심을 끄는 주제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개인은 물론 영국의 생존과 번영을 보장해 줄 수단으로 보았습니다. “리테라이 후마니오레스(Literae Humaniores)”는 지혜로 가는 문이었고 삶의 도덕과 인격의 영양분을 공급하는 보물 창고로 보았습니다.

루이스 시절에 이 과정은 까다롭기도 하고 광범위해서 다른 과정의 전공자보다 더 오래 공부해야 했습니다. 루이스는 이 과정에서 탁월한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과정의 수료를 결정짓는 두 번의 시험에서 각각 1등을 했습니다. 이 어려운 과정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던 것은 많은 독서와 탁월한 고전어 실력을 자랑한 루이스의 실력이 잘 드러난 것입니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루이스가 고전어와 고전 문학을 공부한 것만큼 중요한 것이 루이스의 문학적 실력이 발휘된 것입니다. 1921년 4월에 루이스는 총장배 에세이 공모전에 응모하였고 루이스 작품이 뽑혔습니다. 이것은 루이스가 학자로, 저술가로 그리고 인문학자로 살아가는데 중요한 기회가 됩니다. 

루이스의 대학 생활은 중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아버지와 관계가 단절되는 대신 무어 부인과 관계가 깊어집니다. 이 대학 시절에 영문학을 공부하며 영문학에 상당한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였고 평생을 같이할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이때 오랜 친구 아서 그리브즈와 우정을 심화했고, 오웬 바필드(Owen Barfield)와, 영문학 모범생 네빌 코그힐(Nevill Coghill)도 만났습니다. 

이런 친구들은 루이스 인생의 동반자요 스승이었습니다. 루이스는 바필드를 가리켜 ‘비공식적 스승 중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했고 바필드의 지적은 언제나 수용하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매사에 의견이 달랐던 바필드와의 교제와 우정을 통해서 루이스는 건강하고 견고한 생각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루이스의 옥스퍼드 대학 생활은 알차고 기름진 시간이었습니다. 부담스러운 졸업 시험을 루이스는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했습니다. 90명 중에 1등급을 받은 사람은 6명이었는데 루이스와 그의 친구 네빌 코그빌도 그 여섯 명에 포함되었습니다. 루이스는 3중 1등급을 얻은 탁월한 학생이었습니다.

루이스는 대학을 졸업 후 일자리를 못 구했습니다. 경제 침체로 자리가 줄어들기도 했지만, 루이스를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때 유니버시티 칼리지 학장직에 마이클 새들러 경이 취임했는데 그는 루이스의 글을 읽고 그의 글에 호감을 느꼈습니다. 마이클 새들러의 관심과 철학 교수 애드거 캐릿이 자리를 비우게 되어 철학을 가르치는 것으로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이 시절 루이스는 시작에 힘쓰며 시인이 되기를 힘썼지만 별 소득이 없었습니다. 시인으로서의 한계를 인정했지만, 그는 시를 계속 썼던 것으로 보입니다. 루이스의 이런 도전이 루이스가 평생 작가로 또 인문학자로 사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데 별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인문학자 루이스는 다양한 훈련으로 다듬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Kangtg1207@gmail.com

06.17.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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