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스침례대학교 교수)
독교교육은 역사가 그 역할과 가치를 증거하기 때문에 필요합니다. 역사는 운전할 때 후방을 살피는 거울과 같습니다. 안전한 운전을 위해서는 앞을 잘 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뒤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 살피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특히 차선을 바꾸려고 할 때는 더욱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수시로 과거를 반추해야 합니다. 미래를 향해 계획을 세우려고 하면 과거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초대 크리스천들의 교육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을 보존하고 전달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또한 기독교를 대적하는 세력들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교훈을 바르게 전하는 일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은 정경, 신조, 징계를 바로 세우는데 힘썼습니다.
초대교회의 있어 교육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초대교인들은 공식적인 교육과 비공식적 교육을 모두 중시했습니다. 가정은 여전히 성경진리의 학습과 적용에 있어서 주요 교육기관이었습니다. 교사로서 부모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교회 역시 가르침과 배움의 장이었습니다. 모든 목회자는 “가르치기를 잘 해야”(딤전 3:2) 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에데사, 니시비스 등의) 교리학교(catechetical school)와 새신자 학교(catechumenal school)의 등장으로 부모들은 자녀교육의 부담과 책임을 덜게 되었습니다. 교리학교들은 문답식 교육방법을 사용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생각하고 사유하도록 훈련했습니다. 새신자 학교들은 새로운 회심자들이나 어린아이들에게 구약성경을 가르치고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성인 회심자들은 기독교 진리에 관한 배경이 없었기 때문에 교회의 교제권에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새신자 학교를 거쳐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감독과 사제들이 교리학교와 새신자 학교에서 가르쳤습니다. 2세기부터 5세기까지 교회의 교사들 가운데는 저스틴 마터, 터툴리안, 오리겐, 아타나시우스, 유세비우스, 크리소스톰, 제롬, 어거스틴 등이 유명합니다. 나중에는 평신도들이 교사가 되어 가르치는 일을 맡기도 했습니다.
313년 콘스탄틴의 밀라노 칙령으로 종교의 자유가 선포되었고, 380년 데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국교화된 후 교회의 교육은 성직자나 수도사가 될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과정이었습니다. 소수의 지도자들이 평신도들의 영적인 훈련에 관심을 갖고, 문법, 논리학, 수사학, 수학, 기하학, 음악, 천문학 등의 교양과목들을 교육했습니다.
그 시대에는 기독교교육에 있어 가정이 큰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부모는 자녀교육을 교회에 떠맡겼고, 교회는 가르치는 일을 소홀히 했습니다. 제도화된 교회들은 정부와 결탁했고,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는 교사로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교육은 피폐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수세기 동안 개인들의 신앙에 영적, 교육적 암흑기가 드리워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에 일반인 교육에 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 학교들이 등장했습니다. 교부들이 남긴 문서들을 모아 도서관의 형태를 이루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을 강조했던 스콜라철학이 일어났습니다.
오랜 암흑기 후 14세기에 들어 그리스-로마의 고전을 재발견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사람들로 인해 문예부흥(Renaissance)이 시작되었습니다. 문예부흥이 기독교교육을 직접적으로 장려하지는 않았지만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의 기반을 조성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육을 강조했고 교육자들로 알려졌습니다. 그들은 보편적인 교육, 자국어를 사용한 교육, 성직자 훈련을 지지했습니다. 대학교를 세워 자신들의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사용한 교과과정은 기독교의 진리에 관련된 질문과 대답을 모아놓은 교리문답(catechism)이었습니다. 성경을 주 교재로 사용했지만, 어떤 교회는 교리문답을 강조하여 본의 아니게 성경의 역할을 약화시키기도 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누구나 스스로 성경을 공부할 수 있기 위해 읽고 쓸 줄 알아야 한다고 믿었으며, 신앙생활 가운데 배우고 경험하는 것이 성경적인 것인지 각자 확인해야 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정치 지도자들이 소년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중등학교 대학교를 설립하여 인문학과 종교학을 가르쳐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교육가들 가운데는 에라스무스, 마틴 루터, 필립 멜랑크톤, 존 칼빈, 존 낙스, 유리히 쯔윙글리 등이 있었습니다.
16세기 후반에 들어 유럽 열국은 미국을 식민지화했습니다. 식민지 시대 미국의 교육은 종교개혁자들의 교육철학을 반영했습니다. 반면에 어린이 교육을 강조한 그룹과 비종교적인 교육을 강조한 그룹도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오늘날 공사립교육의 선구자들이었습니다.
종교개혁기와 종교개혁 이후의 시기에는 초등교육이 자국어로 행해졌습니다. 성경이 모국어로 번역되었습니다. 모두가 성경을 스스로 공부하고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목회자가 될 사람들은 성경을 바르고 분명하게 가르칠 수 있기 위해 많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근대에 들어 영국 글로스터의 저널리스트였던 로버트 레이크스(Robert Raikes, 1736-1811) 같은 사람들로 인해 새로운 종류의 교육기관인 주일학교가 생겨났습니다. 주일학교에서는 읽기, 쓰기, 산수, 그리고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주일학교의 설립은 하나의 운동이 되어 매우 빠르게 확산됐습니다. 1785년에는 주일학교가 미국으로 소개되어 침례교와 감리교에서 기독교교육으로 발전했습니다. 특히 침례교는 주일학교를 활용하여 성장의 기적을 이룬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역사를 통해 볼 때 기독교교육은 크리스천과 교회 성장에 중차대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기독교교육의 역할이 약화된 것을 봅니다. 기독교가 중세 암흑기를 다시 겪지 않고 재도약하려면 모든 크리스천들이 기독교교육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재실현해야 합니다.
jonk@dbu.edu
06.25.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