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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땅 (9) - 너를 이끌어 낸 여호와

박성현 박사

 (고든콘웰 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행7:2-4).

창세기 11-12장의 맥락에서 사도행전 7:2-4를 읽으면 몇 가지 차이점이 발견된다. 

첫째, 아브라함이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했다는 내용이다(행7:4). 하지만 창세기 11-12장을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 보면 그 아버지 데라는 아브람이 하란을 떠난 후에도 육십 년을 더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 오세”였고(창12:4),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을 낳아(창11:26) “이백오 세”에 죽었기 때문이다(창11:32). 계산해보면,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데라의 나이는 백사십오 세가 되니 그 후 데라가 죽기까지 육십 년의 기간이 더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란을 떠났다는 사도행전의 언급은 창세기 11-12장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문제를 야기시킨다.

하지만 이 문제는 사본학적으로 비교적 쉽게 해결된다. 한글개역개정 번역의 바탕이 되는 구약 원문은 마소라(Massorah) 전통의 히브리어 사본과 헬라어 번역본인 칠십인역(Septuagint)인데, “이백오 세”는 바로 이 사본들에 근거한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전통의 사본인 사마리아 오경(Samaritan Pentateuch)은 데라의 연수를 “백사십오 세”로 기록하고 있기에, 이 후자를 따른다면 아브람이 하란을 떠난 것은 스데반의 설교에 언급된 대로 정확히 그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가 된다. 성경을 살필 때 사본 비교가 중요한 예 중의 하나이다.

두 번째 차이점은, 아브라함이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행7:3)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것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라는 것이다(행7:2). 하지만 창세기 12:1에서 아브람이 이 지시를 받은 것은 “하란에 있기 전”이 아닌 하란에 있을 당시였다. 그리고 이 지시를 따라 하란을 떠났던 것이다(창12:4). 그렇다면 스데반은 무엇을 근거로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은 것이 “하란에 있기 전”이라 한 것일까?

우선 스데반 당시를 살피자면, 아브라함의 부르심이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시작되었다는 이해는 신약시대 전반에 걸쳐 유대인들 사이에 당연시된 내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필로(Philo, 아브라함 71)나 요세푸스(Josephus, 유대 고대사 1.7.1)의 글이 이를 잘 반영한다. 따라서 스데반은 그의 설교를 구성함에 있어서 자신과 그의 유대인 청중이 가졌던 이해를 바탕으로 아브라함의 부르심을 다루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부르셨다는 이해의 토대는 신약시대 이전, 구약 성경 안에 이미 등장하고 있다. 느헤미야 시대에 율법을 들은 유대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역사를 돌아보며 죄를 자백하는 기도 가운데 여호와께서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셨다는 표현을 썼다(느9:7). 또, 가나안 정복 시대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역사를 되짚으며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촉구하는 가운데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셨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했다(수24:3). 그리고 아브람 당시에 이미 하나님께서 그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내셨다 말씀하신 바 있다(창15:7).

아브람도… 이민 1세 자녀들도…

“이 땅으로” 옮기신 분은 하나님

이렇게 볼 때, 비록 아브람이 부르심을 경험한 것은 하란에서였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의 계획은 아브람이 갈대아인의 우르에 있을 때 이미 실행되고 있었다는 것이 이 사건을 설명하는 성경의 일관된 시각이라 정리할 수 있겠다. 결국,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창11:31) 했다는 데라의 계획과 의지는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만드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진행된 사건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데라가 이민자였다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사랑하는 아들이 세상을 떠난 뒤, 남겨진 손자와 또 다른 아들 아브람, 자부 사래를 이끌고 이민길에 오른 데라가 이국 땅에서 살며 감당했을 어려움과 수고는 이민자라면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민 1세라면 말이다. 낯설고 물 설은 땅에서 가족의 보금자리를 마련코자 애쓴 이민 1세가 가장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 자녀가 새 땅에서 부모 세대보다 더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봤을 때 데라는 이민 결정을 잘 내린 사람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아들 아브람이 이국 땅에서 믿음의 조상이라 일컬어지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데라가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창11:31) 한 그의 뜻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데라가 그 공을 차지하기엔 스데반의 설교가 한 가지를 너무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행7:4). 데라는 그 자신이 아브람을 데리고 이민을 왔다 생각했겠지만, 성경은 말씀하기를 아브람을 “이 땅으로” 옮기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한다. 

오늘 이민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도 같은 공식을 적용할 수 있을까? 우리의 자녀를,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 “이 땅으로” 옮기셨다고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자녀들의 이 땅에서의 삶과 미래는 우리의 계획이 아닌, 철저히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따라 인도되어야 한다는 고백이 따라야 할 것이다. 아브람이 데라가 아닌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아브라함으로 살게 되었던 것처럼, 오늘날 이민 1세의 자녀들 역시 그 부모가 아닌,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 땅에서 아브람이 아브라함 되는 삶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옮기셨느니라”(행7:4)는 표현의 배경을 살펴보자. 그 배경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느헤미야 9:7인데, 궁극적으로는 여호수아 24:3과 창세기 15:7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특히 창세기 15:7에서 하나님은 아브람과 언약을 맺고자 하시며 스스로를 가리켜 “나는 …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라 하신다. 여기서 “이끌어 낸”이란 표현은 이스라엘을 출애굽 사건으로 이어지는 표현이다. 즉, ‘옮기심’은 궁극적으로 ‘구속하심’의 테두리 안에 있는 표현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섭리는 이민자 자녀에게만 국한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입은 모두를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아브람을 우르에서 “이끌어” 내어 아브라함 되게 하신 하나님. 또 그의 후손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스라엘 되게 하신 하나님. 그 동일한 섭리 가운데, 이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에서 “이끌어” 내심을 받은 우리는 크리스천, 즉 메이야 예수의 제자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spark4@gordonconwell.edu

05.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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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21/2022

    수기 머독

    아브람을 “이 땅으로” 옮기신 분은 하나님이셨다는 말씀따라 이 미국 땅에서 태어난 우리 자녀들 또한, 우리가 아닌 하나님께서 “이 땅으로” 옮기셨음을 보고, 이제 예수 안에서 죄와 어둠에서 "이끌어 내어" 생명의 빛과 소망을 주신 신실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우리 자녀들이 다른 세대가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로서 믿음의 "다음 세대"가 되길 간절히 바라며 기도합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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