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말씀과 땅(7)-“하나님의 아들들”

박성현 박사

 (고든콘웰 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

①천사 ②사람 ③군주 3가지 해석...결론은 “사람 욕심의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

‘반드시’ 죽을 자를 살리심...예수를 바라고 흠모하며 사는 것이 우리 기쁨 돼야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창6:1-2).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를 가리킬까? 이 표현이 담긴 창세기 6:1-4은 창세기에서 가장 난해한 본문으로 손꼽히는데, 이 문맥상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해석하는 노력은 아직 뚜렷한 결론에 이르지는 못한 상태임을 미리 밝혀 둔다. 하지만 그동안 어떤 해석의 가능성이 논의 되 왔는지를 살피는 것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여겨져 그 내용을 크게 세 관점으로 분류해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천사라는 해석

 

첫째,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를 가리킨다는 견해다. 이 해석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에녹 1서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하늘의 아들들인 천사들”이라 바꿔 쓴 것이 그 시작이다. 칠십인역도 이 문구를 “하나님의 천사들”이라 옮겨 유사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두 문헌 모두 주전 3-1세기를 배경으로 한 것이므로 우리가 살펴보려는 세 견해 중 가장 오래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견해가 지속적인 지지를 받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들” 또는 이와 비슷한 표현들이 구약 다른 곳에서 ‘천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욥기1:6이 대표적으로 그러하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동일한 표현이 욥기2:6에 되풀이되고, 다니엘3:25에는 이에 해당하는 표현이 아람어로 적혀있다: “…내가 보니…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반면 시편29:1 및 89:6에서 한글개역개정이 각각 “권능 있는 자들” 그리고 “신들”이라 옮긴 문구는 히브리어 원문을 봐야 이 주제와의 연관성을 살필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로 보는 해석의 장점은 비신화화에 있다. 수메르의 길가메쉬(Gilgamesh)처럼 신들과 인간들 사이에 태어난 반신반인의 존재가 있다고 믿었던 고대의 세계관과 달리 창세기6:1-4은 오직 창조주와 피조물인 천사, 인간, 세상이 있을 뿐임을 말씀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천사의 타락에 대한 언급은 신약에도 있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유6).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로 보는 견해는 지금도 여전히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이 해석에 단점은 없을까? 물론 있다. 우선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생육의 기능을 부여하셨다는 근거를 성경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마22:30참고). 그리고 중요한 것은 창세기6 본문이 이 사태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창6:3). 과연 천사가 이 사태를 초래한 것이라면 그 책임은 천사에게 돌아가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본문은 그 문제를 “사람”에게서 찾고 있다. 즉, 사태에 연류 된 모든 당사자들이 “사람”이라 보게 하는 근거를 본문이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2. 사람이라는 견해

 

따라서 이런 첫 견해의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되는 두 번째 입장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이라는 견해다. 이 견해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후손들로서 경건한 삶을 이어간 혈통이며, 그에 반해 “사람의 딸들”은 불경한 가인의 후손들일 것이라는 가정이 세워진다. 즉, 셋의 후손이 가인의 후손과 혼인을 자처함으로 말미암아 그 경건함을 상실해갔다는 해석이다. 

어거스틴을 비롯한 초대교부들은 물론 루터, 칼빈 등 개혁시대 주석가들의 지지를 받았던 이 입장의 장점은 창세기4-5장의 연장선상에서 그 내용을 잘 정리해주며 그 다음 대목인 “노아의 족보”(창6:9-9:29)에서 다뤄지는 홍수심판이 왜 가인혈통만 아니라 노아가족을 제외한 셋의 가문에게도 내려져야 했는지를 살필 토대를 마련해준다는 점이다. 아울러 앞서 언급한 비신화화 작업을 한 차원 더하는 장점 역시 있다.

그러나 이 입장에도 단점이 있다. 본문 1절의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서 “사람”( hāʾāḏām)은 전 인류를 아우르는 집합명사로 해석되는데, 이 단어가 동일한 형태로 2절에도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따라서 2절의 “사람의 딸들”은 전 인류를 아우르는 집합명사로서의 “사람”의 “딸들”로 봐야 문법상 맞는 것이다. 이 점을 무시하고 “사람의 딸들”을 ‘가인의 딸들’이라는 소집합군으로 한정지어 해석하는 것은 문법을 간과할 때에만 가능하다. 공식을 뒤집어 “하나님의 아들들”을 가인의 후예로, 또 “사람의 딸들”을 셋의 후예로 보기도 하는데, 여전히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3. 고대 군주, 왕조의 통치자로 해석

 

그래서 셋째 입장이 등장한다–“하나님의 아들들”이 고대의 군주, 왕조의 통치자들을 가리킨다는 견해다. 유대주석가들에 의해 거론된 바 있는 이 입장은 20세기에 접어들어 고고학 발굴을 통해 고대문명에 대한 이해가 더해지면서 힘을 얻게 되었는데, 다른 어떤 입장보다도 다음 본문을 잘 설명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창6:2). 아울러 이 죄상의 전모를 인간의 영역에서 다룬다는 점에서 창세기 전체에 흐르는 비신화화적 취지를 잘 반영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입장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고대근동의 왕들을 지칭할 수 있다는 것인지 그 주장의 논리절차를 살필 필요가 있다. 우선 본문의 “하나님”(hāʾĕlōhîm)은 문맥에 따라 ‘신들’로도 번역할 수 있는 명사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예: 렘11:12; 시136:2; 대상2:4).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신들의 아들들’로도 번역이 된다는 뜻이다. 

다음으로 “…의 아들들”(ḇənê-)은 ‘…에 속한 자들’이란 뜻을 갖는다. 그래서 한글개역개정은 시편11:4의 ‘아담의 아들들’(bənê ʾāḏām)을 “인생”이라 옮긴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은 ‘신들의 아들들’ 또는 ‘신들’로 옮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는 구약의 맥락에서 다른 ‘신들’은 참 신이 아닌, 사람이 ‘신’이라 부르는 존재를 가리킬 뿐이다. 

결론적으로 창세기6:2에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에 의해 ‘신’이라 불려지는 자들을 뜻한다고 정리할 수 있는 것이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 논리를 잘 주장했던 M. 클라인(Meredith G. Kline)은 창세기6:2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신성왕’(divine kings)을 뜻한다고 결론지은 바 있다. 

그렇게 고대 근동에서 신으로 추앙된 왕은 어떤 모습을 했을까? 필자는 대표적인 예로 나람-신(Naram-Sin)을 소개하고자 한다. 주전 2250년경 아카드 제국(Akkadian Empire)의 제 4대 왕으로 등극한 그는 ‘사방의 왕’(King of the Four Quarters), ‘만왕’(King of the Universe)이란 존호를 취했고, 급기야는 ‘아카드의 신’(God of Akkad)이란 칭호를 더해 메소포타미아 역사상 스스로를 신격화한 첫 통치자가 됐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신’을 뜻하는 기호 *를 사용해 *Naram *Sin으로 표기된다. 한편 1898년 수산(Susa)에서 발견된 승전비에는 나람-신이 군대를 이끌고 룰루비(Lullubi) 부족을 무찌르는 장면이 새겨져 있는데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신을 상징하는 양각 뿔이 돋은 철모를 쓰고 사람의 2배는 되는 큰 키의 용사의 모습으로 우뚝 서 있음이다. 이렇게 ‘신’의 형상을 하고 사람들 위에 군림해 있는 나람-신은 이 기념비를 통해 무려 4천년이 훨씬 지난 오늘까지도 그 이름을 알리고 있다. 

이런 역사의 장면들을 마주할 때 다음 창세기 본문을 떠 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창6:4).

앞에서 살핀 두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세 번째 해석의 틀 역시 한계가 없지는 않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rʾh) 자기들이 좋아하는(ṭwḇ)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lqḥ)”(창6:2). 이 본문은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취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런데 고대근동의 왕들이 이렇게 집단으로 여자들을 취했다는 기록은 아직 없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는 것이 그 한계이다.

 

결론

 

결론적으로 이 세 해석의 가능성은 여전히 가능성으로 남을 뿐이다. 그런데 그 중 어떤 해석을 따르더라도 달라지지 않는 메시지가 있다: 눈으로 보기에(rʾh) 좋은(ṭwḇ) 것을 취한(lqḥ) 사람의 욕심이 초래한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에덴에서 범죄한 인간이 밟았던 전철을 그대로 밟는 것이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rʾh)  먹음직(ṭwḇ)도 하고… 그 열매를 따(lqḥ)먹고…”(창3:6). 에덴의 상실을 경험하고도 그 죄의 길에 다시 돌아가 서는 인간(롬 2:1-16).

그러나 “반드시” 죽어야 할(창2:17) 아담과 하와에게서 “생육하고 번성”할 복을 거두지 않으신 하나님의 은혜는 홍수 가운데도 노아와 그와 함께한 모든 생명을 보존시키셨고(창6:8, 18-20),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자로 말미암아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새생명을 얻게 하셨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십자가로 이기시고(골2:15) “천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시며(히1:4)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신 예수(히1:3). 그 예수를 바라고(rʾh) 흠모하며(ṭwḇ) 사는 것이 그 유업을 받을(lqḥ) 우리 모두의 기쁨이어야겠다.

spark4@gordonconwell.edu

04.16.2022

Recent Comments

  • 4/23/2022

    수기 머독

    창세기 3장과 6장 말씀이 일맥상통한다는 히브리어 관찰과 해석이 새롭고 그 보기에 좋은대로 행한 사람의 욕심이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게 됨을 봅니다. 하지만 은혜로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보기에 좋아서 바라고 흠모한다면 더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광과 부활에 동참하는 참 소망과 기쁨이 있다는 결론이 많이 공감이 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