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WMC 사무총장, Ph.D)
영국 출신의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나 미국의 첫번째 해외 선교사인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과 같은 선교사들이 어려운 환경에서 복음을 전하며 초기 선교사의 이미지를 형성했습니다. 우리들에게 알려진 캐리선교사의 모습을 돌아보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환경과 필요한 인물을 준비하셨습니다. 일을 일으키시기 전에 준비를 하시는 분인 것을 보게 됩니다. 종교개혁의 준비가 이루어진 때에 마틴 루터가 등장한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윌리엄 캐리의 등장으로 세계선교의 큰 장이 열리기 전에 이미 세계선교운동의 개진을 위한 준비는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증기 기관선의 개발로 대양을 통한 동서간의 활발한 해상교통의 발전, 이어진 식민지화가 있었습니다. 또한 교회 내부적으로는 유럽의 경건주의운동과 영국과 미국의 복음주의 대각성운동 등의 영적쇄신운동이 세계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교회를 준비해 왔습니다. 1723년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밀러는 미개인들을 개종시키기 위한 기본적 수단으로서의 중보기도를 주장하고 이후 약 20년 후에는 영국 전역에 식민지의 미개인들을 위한 기도 그룹이 생기게 되었다. 1747년에는 조나단 에드워드가 모든 신자들로 하여금 복음이 세계 땅끝까지 전파되어 나갈 것을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하여 세계복음화를 위한 기도운동이 점차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가운데 윌리엄 캐리가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가난한 구두 수선공 출신으로 잘 알려진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1761-1834)를 오늘날 사람들은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는 40여 년의 인도 선교사역 중 수 없이 많은 난관과 고난에 부딪혔으나 끝까지 인도선교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윌리엄 캐리는 1761년 영국 놀스햄프톤(Northampton)에서 한 가난한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16세에 때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구둣방 도제로 들어가 28세가 될 때까지 구두 수선공의 일을 했습니다. 그는 1781년 20세 때 도로시(Dorothy)라는 구둣방 주인 처제와 결혼했습니다. 그녀는 캐리보다 다섯 살이 많았고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결혼 초부터 그들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고 빈곤과 비참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었습니다. 한동안 캐리는 아내와 자식들뿐 아니라 전 주인의 미앙인과 4명의 그의 아이들까지 부양해야 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도 캐리는 10대에 회심하여 꾸준하게 훈련하고 준비하여 목사가 되었고, 1785년 시골의 한 작은 침례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습니다. 후에 레스터(Leicester)에 있는 좀 큰 교회로 부임해 갈 때까지 그곳에서 헌신적인 목회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선교를 감당할 교회를 준비시키셨습니다. 당시 영국은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와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의 영적 부흥운동이 전국을 뜨겁게 휩쓸고 있었으나 해외선교에 대해선 누구도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캐리도 목회에 전념하느라 마찬가지였습니다. ‘쿡 선장의 항해기’(Captain Cook’s Voyages, 1768-1771)라는 책 내용 중에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마케도니아인의 외침과 “아무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명예도 유익도 뒤따르지 않기 때문이지요.”라는 대목에 가슴이 뜨거워져 그의 시야를 세계로 돌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1792년 87페이지의 소책자를 [이교도의 개종을 위한 수단을 사용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에 대한 조사 An Enquiry Into The Obligation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s] 통해 크리스천은 그 소유를 바쳐 이방인을 회개 시킬 책임이 있다고 역설하고 그 해 10월 이 이사야서 54:2-3절 설교로 침례교 외국 선교회를 (The Particular Baptist Society for Propagating the Gospel among the Heathen) 조직하였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위대한 결과를 기대하십시오,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십시오.”(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 라는 유명한 말은 그후 캐리의 모든 삶과 사역을 대변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1793년 6월 13일 캐리는 온 가족과 함께 인도로 향하는 덴마크 배에 올랐고 5개월의 힘겨운 항해 끝에 11월 19일 인도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인도 현지의 모든 통치권을 갖고 있는 영국 동인도회사(British East India Company)는 인도에서의 선교활동을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인도회사는 캐리 일행이 콜카타(Kolkata, the capital of India’s West Bengal state 캘커타의 영국식 발음을 인도식으로 변경하여 오늘날은 콜카타로 읽는다)로 들어오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캐리 일행은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인도 내륙으로 이동했습니다. 도로시와 큰아이 둘이 심한 병에 걸려 캐리는 이들을 간호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후에 캐리는 450km 인도 북쪽에 있는 말다(Malda)로 가서 한 농장의 지배인 자리를 얻었습니다. 캐리는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말을 배우고 전도할 수도 있어 좋아했지만, 가족들은 너무 어려웠습니다. 아내 도로시의 건강과 정신병이 깊어지던 중 1794년 총명한 눈을 가졌던 5살 된 아들 피터(Peter)가 죽었습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도로시는 거의 반미치광이가 되어 51세에 죽을 때까지 끝내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온갖 시련과 고난 중에도 그는 날마다 성경 번역하는 일을 계속했으며 열심히 벵갈(Bengal)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1795년 최초로 인도에 벵갈 원주민교회가 세워졌습니다. 7년 가까이 벵갈 원주민들이 교회에 많이 나오게 되었지만 정작 인도인은 단 한 명의 개종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캐리는 본국으로부터 그를 돕기 위한 새로운 선교사들이 오자 동인도회사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콜카타 가까이 있는 덴마크령 세람포(Serampore)로 선교본부를 옮겼습니다. 세람포는 곧 영국 침례교회 인도선교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캐리와 그의 동역자인 죠수아 마쉬맨, 윌리암 워드는 세람포의 3인(Serampo Trio)이라고 불립니다. 세람포 선교본부에는 10명의 선교사와 9명의 아이들이 함께 숙식을 했는데 마치 가정집과 같은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사도행전에 나온 초대교회처럼 모든 것을 공유했습니다. 능력에 따라 일을 분담하였으므로 선교사역은 원만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지도자를 준비시키고 함께 할 수 있는 동역자들을 준비하셨습니다. 세람포에서의 성공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을 하지만 첫째는 캐리의 높은 인격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물질적인 희생을 감수하고 선교의 임무 수행을 위해 모든 것들을 희생하는 그의 태도가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포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결점을 감싸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 선교 비를 유용하여 피해를 끼친 토마스에 대해서도 “나는 그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린 아무런 문제 없이 함께 잘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세람포는 성공적인 선교 팀의 모범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는 지속적인 도전이 그침 없는 열정을 타오르게 하였습니다. 캐리는 여기서 벵갈어, 산스크리트어, 마라디어 3개 언어로 성경을 완역하였을 뿐 아니라 다른 언어로 성경이 완역되는 것을 돕고 또 다른 많은 언어와 방언들로 신약성경과 쪽 복음을 번역했습니다. 힌두어, 마하라스티아어, 오리아어, 텔링가어 등 인도 방언들과 보탄어, 버마어, 중국어, 말레이어 등 44여 개의 언어로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세람포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었습니다. 세람포에 선교회가 세워진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첫 번째 개종자가 생겨 모두를 기뻐했습니다. 계속 개종자가 생겨났지만, 전체적으로는 느리게 진행되었습니다. 케리가 인도 선교를 시작한 지 25년이 지난 1818년 무렵 약 600명의 침례를 받은 교인들과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일을 추진해 나갈 도구를 통하여 일하셨습니다. 그의 일생 중 가장 큰 업적은 교회 지도자들과 복음 전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1819년 세람포대학(Serampore College)을 세운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이 학교는 37명의 인도인 학생으로 개교하였는데 그중 절반이 기독교인 이었습니다. 그가 교육 부분에서 이룬 또 하나의 업적은 세속 교육에 있었습니다. 그는 세람포에 온 직후 캘커타에 있는 포트 윌리암 대학의 동양어과 교수로 초빙되었다. 결과적으로 거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선교비를 충당하였으며 동인도회사에 대해서도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학생들로부터 도전을 받게 되면서 자신의 언어 실력도 향상되었습니다.
1807년 도로시가 세상을 떠나고 캐리는 새로운 사람을 만났습니다. 세람포에 요양와 있던 덴마크 왕족 출신의 살로테 루머(Charlotte Rumohr)를 알게되었습니다. 원래 불신자였던 그녀는 회심하여 1803년에 캐리에게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 후 그녀는 시간과 재산을 선교사역에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1808년 캐리는 살로테와의 약혼을 발표하고, 선교팀에 커다란 파문이 일었지만 결혼은 성사되었습니다. 1821년 살로테가 먼저 떠날 때까지 13년 결혼생활은 꿈같은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난생 처음 캐리는 깊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녀는 언어에 탁월하여 성경번역에 큰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이전에 받아보지 못한 깊은 사랑을 주었다고 합니다. 캐리는 1834년 73세에 소천 하였는데 40년 동안 한번도 조국 영국 땅을 다시 밟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사랑하는 인도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삶의 거의 모든 부분 언어학, 식물학, 교육계, 사회변혁, 인쇄술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끼치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윌리암 캐리라고 하는 위대한 선교의 개척자가 희생적으로 자신과 가정을 드려서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사역을 감당한 것에 대해 들었습니다. 사역 우선의 선교적 희생은 한국 교회 선교역사 가운데도 동일하였습니다. 한국선교의 개척자들도 대부분 가정과 사역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바쳐서 선교사역에 열중하였던 것을 압니다. 어린 자녀들을 양화진에 묻어야 했던 선교사 가정들과 젊은 나이에 풍토병과 다양한 질병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야 했던 선교사들은 희생을 각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에 와서 그들에게 제국주의자라는 비판도 있지만 그들의 희생은 쉽게 비교할 수 없는 헌신의 모습이었습니다. 또한 삶의 모든 분야에 관심을 두고 향상 시키고자 했던 것을 문화적 우월감이나 제국주의적 발상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도 그리스도께 받은 사랑이 바탕이 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초기의 선교사들은 희생하는 사람들이며 개척자들이었습니다. 개인의 일보다는 복음전파를 위해 무엇이라도 할 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고난의 여정에서 개척자의 길을 불굴의 의지로 돌파한 헌신의 모범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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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