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WMC 사무총장, Ph.D)
여러분들에게 선교사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모두가 자신의 경험들에 의해서 그 이미지가 생성되었을 수 있고, 아니면 간접적인 경험, 책을 통해서나 이야기를 들으며 다듬어진 선교사라고 하는 이미지가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구체적인 선교사와의 만남이 “선교사”라는 이미지를 만들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던 1977년,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만난 선교사 부부의 모습입니다. 대학생과 청년들에게 영어성경 공부를 가르치시던 Terry and Gay Pye라는 OMF 선교사님 가정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미국으로 떠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영어성경공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선교사님 가족과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선교사님 가정에는 큰 딸, Elizabeth, 그리고 아들 Stephen과 Timothy 가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영국 분들인데 남아공에서도 사셨다고 했습니다. 건축을 공부하고 신학교를 다녀서 성공회 목사가 되셨고, 부인 선교사님은 간호사 출신으로 세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에 오신 것입니다. Terry 목사님은 한국어를 연습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하셨고, Gay 선교사님은 제법 발음 좋게 잘하셨습니다. 아무래도 토목공학을 공부했던 저와 비슷한 배경이라서 더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당시 영어성경공부에 관심이 있는 청년들 몇 명을 연세대학교 근처에 있는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교제하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실 그때에 배웠을 영어성경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기적이지는 않았지만 그 집을 방문하였던 것이 아마 외국인의 집을 방문한 첫번째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집은 좁았지만 깨끗하게 정돈되고 연탄이지만 보일러로 난방을 하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당시 한국의 집들은 부엌에서 연탄을 때서 아궁이를 통해 난방을 하던 것이 일반적이었으니까 선교사님 집은 상당히 개량된 집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선교사님 가족과의 교제는 더욱 가까워져서 Stephen 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에 찾아가서 영어 이야기 책을 읽어 주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내 발음이 다른 영어로 들렸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도 Pye 목사님은 병실에서 나에게 읽어주라고 부탁했습니다. 다음 해에는 우리 어머님의 환갑잔치를 누나 집에서 했는데 선교사님 가족을 초청하여 함께 했습니다. 선교사님으로 서도 한국인의 가정으로 초청은 처음이었을 뿐 아니라 환갑잔치를 처음 구경하는 것이었고, 우리 집안에서는 처음으로 외국인 가족과 환갑잔치를 벌였으니 모두 크게 기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렇게 선교사라는 이미지는 먼 외국에서 우리나라까지 찾아와서 우리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나누려고 노력하는 분이라는 것이고, 일반적으로 우리 보다는 생활 형편이 더 좋고, 조금은 여유 있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 분들이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 후 10년 만에 우리는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태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한국을 들르게 되어 만나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놀랍게 변화하였습니다. 한국이 올림픽을 준비하던 시절이니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내가 장소를 찾기가 어려울 것으로 알아 강남의 유명한 중국집에서 만나자고 해서 찾아가는데 택시를 타고 갔더니 우리 둘만 자동차가 없이 찾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선교사님은 그때까지 자동차가 없이 살고 계셨는데, 그래도 거처는 신촌에서 한강변의 잠실로 옮겨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만나서 그동안의 소식을 나누었는데 “이제는 영국으로 돌아가야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한국이 더 이상 선교지가 아니다, 한국교회가 너무나 많이 성장했기에 내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내 조국인 영국이 이제는 선교지가 되어있다. 거기에 내가 더 필요한 것 같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아이들이 너무나 부모들과 함께 살고 싶어한다. Elizabeth 가 한국에서 외국인 학교를 다닐 수 없어서 일본의 선교사 자녀 학교로 보냈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부모님들과 한 번이라도 함께 살아보고 싶다고 한다.” 당시 OMF 선교사 자녀들은 한국 현지 학교를 보내거나, 일본에 있는 선교사 자녀학교를 보내도록 되어있었기 때문에 부모를 떠나 일본에서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를 다녔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한국에서의 사역을 그만두고 영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저희는 선교지로 나갔고, 그 후 한참 세월이 흐른 후 2005년에 영국을 방문하던 중 Pye 선교사님 부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젠 대학생이 된 우리 아들들과 만났는데 가족 소식을 알려주었습니다. 첫째 딸 Elizabeth 는 선교사가 되어 동남아시아에서 섬기고 있고, 한 아들은 영국의 성공회에서 섬기고 있다고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선교사에 대한 아련한 이미지가 저로 하여금 선교사로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Pye 선교사님 가정이 나에게 영향을 주었듯이 내가 선교사로 살아간 모습은 또 다른 사람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어느 날 나에게 필리핀의 형제가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내가 선교지에서 있을 때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이럴 때에 조목사님은 어떻게 하셨지? 라고 생각하며 일을 처리할 때가 많았습니다.” 아프카니스탄에서 선교사역을 마치고 돌아온 닐로 형제의 말입니다. 제가 필리핀에서 일하던 초기 선교사 시절 대학을 막 졸업한 닐로 형제를 사마르 섬의 씨캅센터에 보내서 스탭으로 일하게 하였습니다. 몇 년이 지나면서 먼저 가서 사역을 하던 줄리 자매와 결혼을 하고 사마르섬에서 함께 일하다가 후에 베트남으로 선교사로 떠났습니다. 국내에서 타문화권 선교사로 일을 마치고 국외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것이지요. 그는 베트남의 시골에서 농촌 개발 사역을 잘 마치고 필리핀으로 돌아와서 프론티어 선교팀을 만들어 다시 아프카니스탄으로 출발하였습니다. 나는 2006년 아프카니스탄을 방문하였을 때에 그들을 만나 사역에 필요한 자동차를 구입할 수 있도록 지원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필리핀팀은 후원이 너무나 적어서 팀전체가 자동차도 없이 칸다하르까지 일반 버스를 타고 다니며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선교단체에 속한 것은 아니지만 베트남에서 사역할 때에도 만나서 격려하였고, 아프카니스탄에도 우리 선교사를 돌보러 가면서 그들을 만났던 것입니다. 닐로형제와 그 팀은 특별히 2007년 단기봉사단 피납 사태로 인하여 한국의 선교팀들이 아프카니스탄을 급하게 철수할 때에 그 뒷정리를 마무리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 후에도 몇 년 동안 현지에서 사역을 잘하다가 장애아들을 더 이상 아프카니스탄에서 양육할 수 없어 본국으로 돌아간 부부입니다. 그들은 필리핀 교회에는 드문 선교의 경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필리핀 교회는 아직도 재정적 후원을 하여 선교사를 파송하는데 제한이 많아서 직장을 가진 평신도 전문인 사역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은 닐로 형제는 영국의 국제개발 단체에서 프리랜서로서 아프리카지역을 다니며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선교사의 이미지는 우리 가정이었고, 함께한 한국선교사 가정들이었을 것 입니다. 그렇게 선교사에 대한 이미지는 직접 경험을 통해 강력하게 틀을 잡게 되고 간접경험들을 통하여 점점 강화되어 갈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통적인 선교사의 상과 역할은 무엇이었을까요? 주로 책에서 배우거나 들은 이미지 이지요. 전통적인 선교사는 주로 서구에서 파송되어 비서구 지역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인물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헌신과 희생을 상징하는 모습이 강했습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19세기 서구 제국주의와 함께 형성되었으며, 선교사는 종종 문명화와 복음화를 동시에 실현하려는 시도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선교사는 백인, 식민주의자, 우월감을 가지고 나누려는 사람들, 잘 사는 사람들, 여유가 있어 보이는 사람들 등으로 그려지고 보였던 것입니다. 이제는 변화하고 있습니다. 백인만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유색인종이며, 다른 나라에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며, 잘 알지 못하는 예수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사람들을 모아서 회중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으로 비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나라들에서는 나이가 많아도 오랫동안 학교를 다닌다고 하거나 특별한 직장도 없어 보이는데 먹고사는 것에 연연하지 않아 보이기도 하고 사람들을 만나는 데에 진정인 사람들로 보입니다. 무엇인가 할 말이 많이 있으나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 좋은 이웃으로 살아가기는 하지만 가깝지는 않은 이웃으로 보여지는 선교사 상에 변화가 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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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7.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