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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배우며 소망을 가진다

조용중 선교사 (KWMC 사무총장, Ph.D)
조용중 선교사

 (KWMC 사무총장, Ph.D)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는 그의 저작 "이성의 삶: 인간 진보의 단계"(1905-1906), 제1권 "상식 속의 이성"에서,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반복하게 되어 있다."라고 했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역사를 통해 우리는 과거를 이해할 수 있고, 이를 통해 현재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지식은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변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복잡한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현재 사회 규범과 문제의 기원과 진화를 이해하며, 과거의 교훈을 통해 의사 결정과 미래 방향 설정에 대해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역사는 우리의 뿌리와 그 이전의 이야기를 탐색함으로써 정체성과 소속감을 증진시키는데 도움이 됩니다. 

풀러신학교의 역사학교수와 선교대학원장이었던 폴 피어슨은 교회사 중에서 선교 역사를 집중해서 연구한 학자인데 그는 역사 연구를 통해 이런 교훈을 얻는다고 말했습니다. 첫째,역사 연구는 정체성을 확립해준다. 둘째, 역사 연구를 통해서 안목을 갖게 해 준다. 셋째, 역사적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넷째, 역사 연구는 인간의 삶 속에 나타나는 어떤 도전적인 상황이나 변화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게 해 준다. 다섯째, 역사 연구를 통해서 역사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이슈들이 반복돼 나타나는 것을 통해서 어떤 선교적 이슈들을 인지하게 된다. 여섯째, 역사 연구는 새로운 사건이나 변화, 이슈들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갖게 해 준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사도행전과 초대교회 선교 운동사를 통해서 중요한 세가지 이론을 정립하였습니다. 첫째, 선교 운동과 부흥 운동의 상관관계 이론입니다. 선교운동은 항상 성령께서 이끄시는 부흥 운동에서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둘째, 새로운 신학적 돌파 이론입니다. 새로운 문화 속에서 진행되는 선교 운동은 이전의 신학으로 설명할 수도 없는 새로운 신학적 측면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선교 운동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 사회 속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변화가 늘 있었다는 핵심 인물 이론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그 이론들이 항상 이루어져 왔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선교 역사에는 변두리 사람들을 사용하여 새로운 선교 운동을 이어 왔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교회와 교단이 선교적 사명이 있음에도 이를 잘 수행하지 못할 때에 하나님은 주변의 집단들을 통하여 일하였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랄프 윈터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구속적 사역을 이루는 두 조직, 교회 조직 (모달리티)과 선교 조직 (소달리티) 가운데 선교 조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항상 두 조직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 상태가 오히려 선교를 창조적이고 유익한 방향으로 인도한다고 했습니다. 교단이 가지고 있는 재정, 인력과 선교 단체가 가지고 있는 열정과 비전을 서로 인정하며 협력하면 선교에 큰 시너지를 가져온다고 조언하였습니다. 

피어슨은 선교 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평신도들이 하였음을 인식하였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누구에 의해 세워졌는지 언급하지 않고, 로마의 교회도 어떤 사도나 유명한 사역자가 나서지 않는다는 것을 보고 현대의 아프리카 교회나 중국 교회의 부흥에도 결정적인 평신도들의 역할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중세의 종교 개혁이 시작되기 전에 프랑스 리옹에 살던 부유한 상인이었던 피터 왈도가 카톨릭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며 성경이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임을 강조하고 일반인들이 읽을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여 평신도들이 개인적 신앙과 성경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을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사도적 생활에 영감을 받아 발덴파는 빈곤과 단순한 삶을 옹호하며 당시 교회 계층의 부와 권력을 비판하였습니다. 그들은 만인제사장직을 믿으며 평신도가 성경을 설교하고 가르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로 부터 이단으로 선언되고 심각한 박해를 받았으나 회복되어 살아남았습니다. 그들은 결국 16세기 종교개혁을 견인하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평신도들의 역할은 중요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피어슨은 선교 운동은 약자의 복음이 강자에게 전해질 때에 진정한 복음의 메시지가 전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강자가 전하는 복음이 약자에게 진정한 복음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토착 교회 리더십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토착 교회 지도자 자격 조건은 무엇이며, 토착 교회 리더가 되기 위해 신학 교육은 어디까지 해야 하며, 누구의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 그리고 예배 형식이나 교회 구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

선교 역사에는 새로운 신앙생활 양식을 제공하는 새로운 운동들이 생겨났습니다. 청교도 운동과 경건주의 운동은 개신교 선교 운동에 새로운 신앙생활 양식을 제공하고 이를 통해 선교적 돌파가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그들은 종교 개혁의 연장선에서 자신의 신앙을 애써 지키며 하나님의 선교적 소명에 충실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일반인들이 보지 못했던 것들을 선교적으로 세상을 보고 새로운 운동을 일으키는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이들은 개인 성경 연구에 관심이 많았고, 평신도 사역에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라비안 운동과 18세기 복음적 부흥 운동으로 이어져 가며 사회 변혁을 촉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영국 교회의 개혁을 보기 보다는 정부의 커다란 박해로 국외로 추방당하며 네델란드와 뉴잉글랜드로 흩어져서 초기 북미의 선교 운동에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이 경건주의 운동은 모라비안 운동으로 이어져 갔으며 그들은 윌리암 캐리가 인도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5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모라비안은 독특한 선교 운동의 모델을 제공합니다. 1822년 아마 종교 박해를 피해 나온 후스파 형제단의 작은 무리들이 진젠도르프 백작의 땅인 모라비아 지역으로 이주하며 생겨난 난민 공동체였습니다. 다른 신앙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도 함께 가세 하게 되어 연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 환경에서 오순절 같은 강력한 부흥을 경험하게 되며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유명한 24시간 연쇄 기도를 시작했고, 그 기도회는 향후 100년 동안 지속되어 모라비안 선교 운동을 이끄는 활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피어슨은 그들이 여러 면에서 개신교 수도원 운동과 유사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결혼을 하여 가정을 가졌고 결혼 대상자를 규정에 따라 통제되었다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어느 곳으로든지 갈 수 있도록 훈련을 강하게 받아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고 합니다. 1732년에 최초로 서인도제도에 선교사를 파송 하였습니다. 1760년 진젠도르프가 소천하기까지 226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그들은 비즈니스 선교를 하며 자비량으로 선교하였습니다. 이들의 영향을 받은 웨슬리 형제의 회심은 영국을 변혁시키는 놀라운 경건주의 운동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들의 선교 운동은 사회 변혁 운동으로 총체적 사역의 모델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피어슨은 선교 운동이 활성화 되기 위해서는 선교 정보가 확산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윌리암 캐리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목사의 일기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부흥과 부흥을 위한 기도 합주회에 대한 개념, 그리고 모라비안들의 선교 활동에 대한 정보들에 의해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윌리암 캐리는 이교도들을 개종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직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비기독교인들을 위한 선교를 위해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인도에 가게 된 것입니다. 이 때부터 개신교의 많은 선교단체들이 생겨나고 폭발적으로 성장을 하게 됩니다. 라투렛은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시기를 “위대한 시기”로 명명하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시기의 특징은 1) 새로운 선교단체들의 폭발적인 성장을 보여줍니다. 이 시기에 기독교 선교는 물질문명의 발달과 함께 발전하였습니다. 많은 서구인들은 다른 세계에 대해 문화적인 책임감을 느꼈으며 일종의 ‘백인의 책임과 부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식민지주의와 함께 선의로 동행한 사람들이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윌리암 캐리는 인도에서, 후에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에서, 리빙스톤은 아프리카에서 섬기었습니다. 

또한 학생 운동들이 이 시기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윌리암스대학의 건초더미 기도회가 시발이 된 형제회 (the Society of Brethren), 신학교들이 참여한 선교탐구학회, 1844년에 설립된 YMCA 등이 후에 학생자원운동으로 꽃을 피우게 됩니다. “우리 세대에 세상을 복음화하자”는 슬로건을 내세워 선교사들을 지원하고 파송한 결과는 1000명 미만의 선교사 숫자가 25년 후에 9,000명으로 증가하였고, 1945년에 이르러서는 2만5백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계대전 이후 신학적 혼돈과 유럽의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인한 기독교 문화에 대한 실망감, 리더십의 부재가 학생 운동을 쇠퇴하게 만들어 버렸다고 지적합니다. 

세계선교 운동에서 여성 선교사들의 중요성에 눈을 떠야 합니다. 피어슨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던 많은 무명의 사역자 중에 대부분이 여성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6장에서 일곱 명의 여성 사역자들을 동역자로 부르고 있을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미국에서도 최초의 해외선교회가 발족하기 10년 전에 메리 웹의 선교후원회가 조직되었습니다. 물론 선교를 위한 기도회와 자금 모금을 위한 정도로 제한되었지만 결혼한 선교사로 나가게 되었고, 부인 선교사가 감당하지 못하는 사역들을 위해 독신 선교사들이 파송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860년까지 미국 선교부는 남자 567명, 여성 691명의 선교사를 임명했는데 독신 여성들이 124명이 있었고, 그 가운데 30여 명이 해외 선교사로 파송되어 일하였습니다. 후에 여성들만을 위한 선교사협회들이 만들어지면서 더 많은 여성 사역자가 해외로 파송되었습니다. 1900년에 이르러서는 여성 선교사협회가 41개가 될 만큼 성장하였는데 피어슨은 그 이유를 여성 교육의 변화와 여성들이 교사로 진출하게 된 것과 노예 제도 폐지 운동의 결과로 이렇게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위대한 세기에 중요한 선교대회가 열렸습니다. 1910년 에딘버러에서 열린 선교대회는 선교 역사의 이정표였습니다. 존 모트의 리더십으로 선교단체들과 독립선교 단체에서 파송된 1200여 명이 참석하여 세계선교를 위한 전략을 모색하는 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이 대회에는 17명의 아시아 대표들이 참석하였으나 그 외에는 모두가 서양인이었습니다. 이 대회에서 연합정신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후에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변질되어 1948년 WCC (세계교회협의회) 가 설립되고 세계선교의 주제는 점차 사라져 버리는 안타까운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에 1974년 세계복음화를 위한 로잔세계선교위원회가 조직되고 로잔 언약을 만들었으며, 1989년 2차 로잔 마닐라대회, 2010년 3차 로잔 케이프타운 대회가 열렸고, 2024년 9월에는 제4차 로잔 서울대회가 열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어두운 시대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일하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시대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시고 사용하셔서 빛을 발하게 하시며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모든 전망이 어두운 포스트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내일이 없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은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준비하고 계시며, 한 민족이 일어나고 사라지면 다른 민족을 들어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고 겸손히 섬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dr.yongcho@gmail.com

 

04.20.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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