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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 호의적인 황제 - (2) 콘스탄티누스 2세

한평우 목사 (로마한인교회)

기독교를 공인하고 니케야 신경을 만들어 대왕이라는 칭호를 들었던 콘스탄틴은 무려 30여년을 다스리며 나라를 기독교화 했다. 또한 그의 어머니 헬레나의 헌신은 경이로웠다. 곳곳에 산재한 기독교 성지를 찾아다니며 유물들을 수집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위험과 두려움을 무릅쓰고 말이다. 그런 노력의 결실로 남겨진 로마의 십자가 성당에는 한편 강도가 짊어졌던 십자가의 형틀과, 주님께서 박히셨던 십자가의 대못, 그리고 십자가의 명패, 또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던 바위 조각 등등이 수집되어있다.

그 뿐인가? 마틴 루터가 무릎을 꿇고 올라갔다는 스칼라(S’Scala)계단(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기 위해 걸어가셨던 28개의 돌계단으로 가톨릭 교인들은 지금도 무릎을 꿇고 죄를 자백하면서 올라가면 죄가 사해진다고 믿고 있음)을 가져와 스칼라 계단을 만들게 했다. 그녀는 아들의 왕권을 이용하여 기독교를 전파하고 뿌리를 내리는 일에 놀라운 헌신을 했다. 그런데 그런 콘스탄틴 대제는 부상하는 페르시아를 향한 전쟁을 추진하던 중에 과로로 죽었으니 그 때가 337년이었다. 수많은 기독교도들은 그의 장수를 염원하였는데 말이다. 그의 죽음은 곧 피바람이 불게 될 것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권력의 속성이란 혈육에 대한 사랑이나 양보라는 단어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왕후 파우스타와의 사이에 세 아들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2세는 20살, 콘스탄티우스는 19살, 그리고 콘스탄스는 17살이었다. 이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제국을 삼등분으로 나누어 다스리도록 했다. 콘스탄티누스 2세는 갈리아, 부리타니아, 히스파니아를, 콘스탄스는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그리고 나머지 제국 동부를 콘스탄티우스가 다스리도록 했다.

340년에 콘스탄티누스 2세가 막내동생 콘스탄스에게 아프리카를 양도하라고 했으나 코웃음을 치자 군대를 거느리고 진격했다. 그러나 전사함으로 제국은 거대한 서방을 다스리게 된 콘스탄스와 동방의 황제인 콘스탄티우스 2세로 양분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콘스탄스는 신학적으로 유명한 감독 아타나시우스의 편을 들었고, 형 콘스탄티우스 2세는 이단으로 기운 아리우스파를 지원하는 일로 묘한 갈등을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방대한 지역을 다스렸던 막내 콘스탄스에게 형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리우스를 적대시하는 아타나시우스를 처벌하려고 했으나 동생 콘스탄스 때문에 행동에 옮길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로마를 다스리던 콘스탄스는 휘하 장수인 게르만족 출신 장군 마그넨티우스가 봉급에 대한 불만을 이유로 살해당하고 그 자신이 로마의 황제임을 참칭했다. 이 일로 인해 어거스틴은 로마의 오스티아 항구에서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장례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뱃길이 막혀버리는 불편함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 일어나자 콘스탄티우스 2세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서둘러 강화로 끝내고 도나우 강 유역을 맡았던 베트라니오에게 항복을 받아냈다. 항상 위기는 전방의 장군들 때문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후 마그넨티우스와 3년여 동안을 내전을 벌려 그가 거느린 군사 3분지 1을 죽인 후 비로소 그를 결국 굴복시킬 수 있었다. 마그넨티우스를 굴복시킴으로 그는 아버지 콘스탄틴 대제처럼 통일천하를 이룰 수 있었다. 그는 주도면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성격은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조심성을 갖게 되었고 그런 조심성은 황제로서는 안성맞춤의 자세였다. 그래서 항상 자만하지 않고 주변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 같은 군사적 자질은 없었으나 조직력과 또한 강한 책임감을 갖추고 있었다. 고로 체제의 안정에 많은 정성을 쏟을 수 있었고 군인들에게도 큰 관심을 가지고 세심하게 신경을 썼음으로 황제들이 가장 골치 아파했던 야전군을 장악할 수 있었다. 특히 보병들로 하여금 강한 기병으로 전환토록 하여 약체인 동 로마제국이 강력하게 부상한 페르시아 군에게 밀리지 않는 강한 군사력을 보강함으로 국가의 안정을 도모했다.

그는 건축학적으로도 유명한 건물을 남겼다. 즉 이스탄불에 있는 웅장한 소피아 성당은 그가 360년에 건축한 건물이다. 50만 명이 넘는 인원이 동원되어 6년 동안 쉬지 않고 공사함으로 완공을 보았다. 그 건물은 역사와 함께 많은 수난을 당해야 했는데 1204년에는 제 4차 십자군에 의해 점령당한 후 가톨릭 성당으로 바뀌었고, 1261년에는 다시 정교회 성당으로, 그 후 이슬람의 술탄이 점령한 후 또 이름을 바꿔야 했다. 이름만 바꾼 것이 아니라 내부의 기독교적 그림들을 회칠한 후 이슬람의 그림으로 바꿔버리는 수난을 당해야 했다. 그 돔 꼭대기에 달린 이슬람을 상징하는 반달 장식의 조각을 보고 그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렸던 천국에 간 수많은 성도들은 뭐라고 여길지 모르겠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성공한 황제였으나 종교적으로 정통인 아타나시우스를 거절하고 후에 이단으로 낙인찍혔던 아리우스를 좇은 것은 옥에 티 같다하겠다. 그는 이교도 박해법을 제정했고,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신전의 파괴를 독려했다. 그는 자신에게 신학적으로 저항하는 아타나시우스를 끝까지 추적하여 죽이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아버지 콘스탄틴 대제가 니케아공의회(325년)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규정하였으나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접근하였고 그 후 콘스탄티우스 2세 치하에서는 전 로마제국을 지배할 만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아리우스는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일본질이라고 말하지 않고 유사본질(Homoiousios)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에게 미혹된 황제로 인해 정통신앙을 고수했던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타나시우스는 교리문제로 환난을 당해야 했다. 그는 무려 20년 동안 6차에 걸친 추방을 반복해야 했다. 니케아종교회의에서 가결한 성부와 성자는 동일본질이라는 교리를 바꾸어 유사본질로 고치게 하는데 있어서 아타나시우스는 최대의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카톨릭에서 마리아를 원죄 없이 탄생하여 예수님을 낳고 동정을 지키다가 원죄 없이 승천하셨다고 믿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마리아를 중보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운동도 일어나고 있고 언젠가는 그것이 현실화 될 것이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아타나시우스가 지킨 바른 신앙의 길을 걸아가야 한다. 6번이 아니라 60번을 추방당하는 일이 있다 해도 말이다. 콘스탄티누스 2세 역시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이복형제들을 죽였고, 친 형제들의 칼부림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중재하고 막았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그 많은 죄를 탕감 받기 위해 의식적으로 신앙에 매진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 콘스탄틴 황제처럼.... 권력과 신앙, 그것은 어쩌면 양립하기 어려운 방정식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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