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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박해자(9)-데키우스 발레리아누스 황제

한평우 목사 (로마한인교회)

기독교 역사를 보면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언제나 피를 드려야만 했다. 진리는 항상 그 가치를 깨달은 사람들에게 선택을 요구했고 그 선택은 생명을 희생하는 것으로 귀결되곤 했다. 세상은 어두움의 세력이었기에 진리를 지키려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앞으로도 계속 죽일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의 진리를 수납한 자들은 항상 피 흘릴 각오,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오히려 세상에서 인정받고 인기를 구가하는 길을 좋아할 때 진리는 훼손되고 신앙은 부패하게 됨을 역사는 증거 한다.

이노센트 3세(1198-1216)는 당시의 교회의 부패상을 이렇게 지적했다. “파수꾼들은 모두가 눈멀고 짖을 수 없는 벙어리가 되었다. 그들은 선지자의 말처럼 인색하고 선물을 좋아하고 포상받기를 기뻐하고 뇌물을 받고 불경건한 자를 옳다하는 가하면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른다.” 복음의 가르침을 그릇되게 해석하여 왜곡하고 교회의 법을 어지럽힌다. 그러니 이단들의 기세는 높아지고 교회를 멸시하는 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지 않는가! 영적으로 캄캄했던 중세나 오늘날도 비슷하지 않을 까 싶다.

데키우스 발레리아누스(Publius licinius Valerius 200?-260), 그는 로마의 귀족 출신이다. 로마의 내전에서 승리한 아이밀리아누스를 굴복시키고 60대의 나이로 로마의 33대 황제가 되었다. 그는 집정관을 역임했고 학식과 분별력 그리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황제가 된 후 방위선을 정비하고 지도자를 양성하는 데 관심을 기우렸다. 한 사람의 훌륭한 지도자가 할 수 있는 엄청난 일들을 역사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황제는 처음 3-4년 동안에는 기독교인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황실과 고위 관리직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황제들이 부하군인들에 의해 빈번하게 바뀌는 현실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다. 더구나 기독교인들은 아직도 군 복무나 국가 공직에 참여하기를 꺼려하는 상황이었기에 충성에 대한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는 불안한 제국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부하들의 절대적 충성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부하들 가운데 누가 자신의 말에 충성하고 불 충성하는지를 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는 황실과 정부 고위관리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을 색출하여 황제의 명령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교회 감독의 명령을 따를 것인지를 선택하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교회를 따르는 자들을 처형하기로 했다. 황제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 기독교도들을 향해 그들에게 관용을 행사하지 않기로 했다. 그들을 방치하게 되면 국가의 안녕이 흔들리게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황제는 드디어 AD258년에 기독교에 대한 처벌을 성문화했다. 즉 성직자들은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교회 집회를 금지했고 기독교 신앙을 가진 귀족들은 그들의 지위가 박탈되었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또한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강제노동과 수용소로 보내도록 했다. 이런 핍박으로 인해 칼타고의 감독 키프리아누스(Cyprianus200-258)가 순교를 당했고, 로마 주교 식스투토 2세(Xystus 2세 257-258)와 스페인의 타라고나 지방의 감독 투르투어스와 부 감독들이 대거 순교를 당해야 했고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은 유배형을 받았다. 당시 군대 내에 기독교인들이 점진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고로 충성스런 신자들 가운데 빠른 승진의 대열에 합류하는 사람들이 일어났다. 그러자 경쟁자들이 상대가 그리스도인임을 판사에게 고발하여 처형을 당하게 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고발을 당하면 판사는 군인 신자들에게 몇 시간의 말미를 줄 터이니 그를 제단 앞으로 데리고 나와 칼과 복음서를 놓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 군인 성도들은 기꺼이 복음서를 선택하였다. 그리고는 순교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갔다. 어떤 지역에서는 군인 40여명을 색출하여 겨울에 강물에 들어가도록 명령하여 밤새도록 거기서 나오지 못하게 하여 얼려 죽이는 일도 있었다. 저들은 도무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같았다.

그런데 핍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유는 발레리우스 황제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이다. 황제는 전쟁에 패하였을 뿐 아니라 페르시아의 왕 사푸르(Sapor)에게 포로(260년)로 잡히는 치욕을 당했다. 로마황제 중에서 유일무이한 일이다. 여세를 몰아 페르시아인들이 마르모라 해까지 침입함으로 동방의 방어는 큰 위기를 맞이했다. 더 나아가서 고트족들은 다뉴브 강을 건너 북쪽 국경을 넘어왔고 다른 야만족들도 라인 강을 건너 제국 영토를 유린했다. 로마제국이 이처럼 불안하였으므로 영국 역사가 기번은 필립프스 황제의 천년제가 있은 후 갈리에누스 황제까지의 20년간(248-268)을 “치욕과 불운의 시대”라고 명명했다. 그 20년 동안 수많은 황제들이 일어났고 군인들은 조국을 방위하는 데는 관심이 없고 오직 후한 봉급을 줄 수 있는 황제만을 요구했고, 원로원은 한없이 무능했기 때문이다. 이런 국가적 고난은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하시는 섭리일 지도 모른다. 사람이나 국가는 고난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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