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기독교 박해자(8)-데키우스 발레리우스 황제

한평우 목사 (로마한인교회)

로마는 다신교를 섬기는 국가이었기에 다른 신을 섬기는데 관대한 편이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타종교와는 다르게 타협을 불허하였기에 통치자로서는 걸림돌로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국가적으로 재난이 올 때나 문제가 있을 때 그 원인을 기독교 탓으로 돌리곤 했다. 하나를 이룰 때 국력은 강성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는 풍수지리설이 매우 편만하여 국가나 가정에 어려움에 임하면 조상의 묏자리 때문이라는 인식이 편만하여 묏자리에 관한 소송이 빈번했던 것처럼. 문제 앞에서 그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하지 않고 핑계나 탓으로 돌리려는 인간의 부패 한 속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세계를 호령하던 강력했던 나라, 인류 역사에서 가장 찬란하고 장구한 역사를 유지해온 나라가 점점 쇠락해가고 국력이 흔들리자 그 원인을 황제는 기독교에서 찾으려고 했다. 당시 기독교는 황제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는 유일한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어수선한 때에 황제에 오른 사람이 데키우스(Decius Valerianus 249-251)다. 그는 아랍 출신의 필립 황제를 베로나 근처의 전투에서 물리치고 왕위에 오른 사람이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 로마제국을 과거의 강력한 국가로 회복하려고 했다. 그러나 곁에서 보는 것과 막상 그 자리를 앉아보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는 법이다. 그는 250년 1월에 작심하고 기독교를 파괴하려는 법령을 선포했다. 즉 로마제국의 모든 시민은 국가적으로 섬기는 신만을 경배하고 행정관이 보는 앞에서 그 신에게 신성한 제물을 드리라고 말이다. 이 포고령은 기독교인들을 크게 반발하게 했다. 이처럼 기독교를 로마제국에서 공식적으로 말살하려는 박해는 처음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런데 예상을 뒤엎고 이 핍박으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포기하는 사태가 속출했다. 칼타고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자발적으로 로마의 신을 섬기는 제단에 나갔고 심문을 받기도 전에 신앙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신앙을 변절하고 이교도 신전에 제물을 바치기 위해 늘어선 기독교인들로 넘쳐나서 관리는 다음에 오라고 돌려보내야 할 정도였다. 다른 지역에서는 기독교인들이 감독의 인도로 집단적으로 이방신을 섬기는 일에 합류했다.

로마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신에게 제사를 드렸고 서머나에서는 감독 육테몬(Euctemon)이 배교하는 놀라운 일도 일어났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반영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곡들은 여러 지역에서 자신의 신앙의 순수성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이 핍박으로 로마의 감독 화비안(Fabian), 예루살렘의 감독 디오니누스(Dioninus)가 처형당했고 칼타고의 감독 키프리아누스(Cyprianus)는 겨우 피신했고 오리게네스(Origenes)는 이때의 고문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어야 했다. 참으로 놀라운 현상들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성도들이 핍박 앞에서 배교하는 현상을 보며 당시의 영적 지도자였던 키프리아누스는 이런 말을 했다. “오랜 동안의 평화가 주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생활의 기강을 타락시켰다. 개인들은 부를 누리는 데만 관심을 기우리다가 사도 시대의 신자들의 행위가 무엇이었는지를 잊어버렸고 그들의 행위가 어떠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버렸고 자선의 행위도 없었고 신앙의 훈련도 없었다. 남자들은 흉측하게 수염을 길렀고 여자들의 미는 허위로 장식되었다. 눈 모양도 바꾸었고 머리색도 가짜로 만들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격려와 모범이 되어야 할 감독들이 그들의 거룩한 사역을 멸시하고 세속적 직업에 종사했다. 그들은 직분을 버리고 양 무리들을 떠나 해외에 여행하면서 돈을 모으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어쩌면 이 시대의 현상과 비슷하지 않을 까 싶다. 그런데 기독교를 철저히 말살시키려고 시도한 데키우스 황제가 고트족과 전쟁 중에 251년 6월에 전사하고 말았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혹독했던 박해는 끝나게 되었다. 박해를 피해 카타콤베로 숨어들었던 사람들은 환호했을 것이나, 배교했던 무리들은 낯을 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배교한 자들은 회개하기보다는 변명하고 변장술로 힘 있는 쪽에 서서 대변자로 또 나선다는 사실이다. 역사는 항상 그런 모습을 보여왔다. 우리는 은혜로 받은 구원을 목숨을 걸고 지켜내야 한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향한 최소한의 삶의 응답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어떤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가?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