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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박해자(6)-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한평우 목사 (로마한인교회)

로마제국의 전성기는 5현제인 아우렐리스 황제를 끝으로 서서히 내려가고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콤모두스는 한 마디로 역량 미달의 왕이었다. 그가 암살당한 후 명망 있는 장군 출신이자 집정관이었던 페르티낙스가 황제에 올랐다. 그는 군비지출이 지나친 것을 깨닫고 그것을 고치려다가 반발한 군부에 의해 암살을 당했고 그 후 황제가 다섯 번이나 바뀌는 정치적 혼란이 야기되었다

이때 혜성처럼 나타나 정치적 안정을 도모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로마제국의 20번째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191-211)다. 그는 특이하게도 북아프리카 출신이다. 보통 북아프리카는 얼굴이 까무잡잡한 베르베르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기독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어거스틴 역시 베르베르족이다. 그는 현재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의 근교인 렙티스 마그나에에서 탄생했다. 이곳은 기원전 3세기에 해상 무역으로 위력을 떨쳤던 곳이요, 한니발로 하여금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진격하여 간담을 서늘케 했던 나라였다. 후에 로마에 편입되었지만. 세베루스는 북아프리카의 문화를 따라 마술, 미신을 연구했고 꿈을 해석했고 점성술에 능했다. 그러기에 태생적으로 기독교와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첫 부인이 죽은 후 두 번째 부인을 점성술에 의지하여 얻었다. 그녀는 에메사(Emesa, 시리아의 안디옥교회 부근) 출신으로 태양신인 바알을 섬기는 엘가발 사원 대제사장의 딸이었다. 그녀는 세베루스와 결혼하여 두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를 낳았다.

그녀는 황제에게 로마의 전통적 종교를 일으켜 국가를 위협하는 불순한 세력을 무력화시키라고 권했다. 당시는 정치적으로 불안했다. 북쪽에서는 게르만의 위협이 끊이지 않았고 자신은 군대의 후원을 받아 황제가 되었기에 군대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는 정황이었다. 그는 군대의 봉급을 파격적으로 인상함으로 일시적 지지를 받았지만 그것은 그에게 하나의 큰 올무가 되었다. 이유는 국가의 재정은 풍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탈리아인과 원로원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원로원 41명을 처형했고 그들의 가족과 하인들까지 죽였으니 얼마나 보복에 대한 불안한 삶을 평생 살아야 했을까 싶다.

황제는 왕후의 조언을 듣고 로마 전 지역에 태양신 바알을 섬기도록 명령했다. 태양신을 지존의 신으로 세운 후 다른 모든 신들을 그 산하에 두어 종교적 통일을 이루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친정에서부터 태양신을 섬겨온 왕후의 계략이었다. 마치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과 같다. 이런 역사를 보면 개인이나 왕에게도 아내의 바른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왕은 종교인들을 힘으로 제압했고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반대했던 유대교와 기독교를 혹독하게 탄압했다. 황제는 두 종교를 말살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더 이상 신자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법령을 공포했다. 이런 상황에서 특히 애굽과 북아프리카에서의 탄압은 극심했다. 초대교회를 연구한 프렌드 교수에 의하면 히폴리투스(Hippolytus 170-236)의 기록을 예로 들어 말하기를 로마, 알렉산드리아, 칼타고, 고린도, 안디옥 등지에서 화형, 참수형, 태형 등의 박해가 일어났고 이런 박해는 그 후에 일어나게 될 공적 박해의 전조였다고 했다.

그들은 정한 날(주일)을 기다려 예배장소로 들어가 사람들을 체포하였고 그들에게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도록 명령했다. 이를 거부할 때 재판관 앞으로 데려가 황제의 칙령을 범한 죄목으로 정죄한 후에 가차 없이 처형했다. 이때에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Origenes)의 아버지 레오디데스와 여러 사람들이 순교 당했다. 페루페투스의 순교를 기록한 터툴리안은 203년 기독교에 입교한 많은 초신자들이 교사들과 함께 죽어야 했다.

기독교사의 위대한 지도자 안디옥의 클레멘트가 순교를 당했고 오리겐과 이레내오 역시 순교의 제물이 되어야 했다. 이런 정황에서 터툴리안은 의분이 일어나 기독교를 옹호하는 변증 문을 썼다. 그리고 기독교인들도 정당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기독교인들에 관용을 베풀어줄 것을 황제에게 간청했다. 황제는 60세가 지났는데도 갈레도니아(현재의 스콧틀랜드)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했고 거기서 죽었다. 그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나는 원로원의원도 해보았고, 변호사도 했다. 대대장이나 집정관도 역임했고 장군도 경험했다. 국가요직을 두루 거쳤고 황제도 해보았다. 나는 주어진 임무들을 충실하게 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 모두가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인생은 모름지기 헛된 것일 뿐이다.” 그 사실을 진작 깨달았다면 무모한 탄압은 하지 않았을 것을.... 당신도 후회하지 않도록 오늘 진실을 쫓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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