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우 목사 (로마한인교회)
조선시대 세자에게는 감성을 자극하는 시나 문학을 가르치기보다는 머리를 많이 써야하는 철학을 공부시켰다고 한다. 군왕에게는 감성보다는 냉철한 이성을 통한 분별력이 필요하기기 때문이다. 보편적으로 감성적인 사람은 모질지 못하다. 지도자가 냉철하지 않게 되면 급박한 국가적 상황에서 분별력을 잃기 쉽다. 그럼에 비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 철학자요, 사상가로 분별력을 잃고 기독교인들을 핍박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훌륭한 지도자에 대하여 언급할 때 소위 준비된 자의 필요성을 언급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61-180)는 잘 준비된 자였다. 광란의 지도자 갈리굴라(37-41)가 4년 만에 친위대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그 와중에 준비되지 못했던 황제가 갈리굴라의 삼촌 클라디우스 황제다. 그러나 아우렐리우스는 달랐다. 그는 안토니우스 황제 곁에서 세 번의 콘술을 역임했고, 호민관도 했고 공동 황제의 역할까지 두루 경험할 수 있었으니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사람들의 큰 기대를 받았다. 특히 할아버지는 로마의 집정관을 연임하는 중이었고 고모는 황제에 즉위하기로 약속된 사람과 결혼했고 조카 아우렐리우스에게 제위를 계승하기로 정해진 상황이었다. 이런 가문이란 점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당시는 오현제의 시대로 국가의 평화가 정착되었던 시기였다. 왕의 지도력은 항상 평안한 때 보다는 국가의 위기에서 역량이 들어나도록 되어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지도력을 시험이라도 하려는 듯 그가 왕이 되자 이곳저곳에서 문제가 터지게 되었다. 마치도 구멍난 호수 이곳저곳에서 물이 새어나오듯.... 161년에 동쪽에서는 파르티아가 위협의 세력으로 부상했고, 도나우 강 유역에서는 게르만족이 국경을 위협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팍스로마나의 평화가 위협을 당하고 있었다.
황제의 일차적 임무는 조국을 위기에서 안전하게 지켜내는 일이다. 고로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스토아 철학자로 고요하게 사색을 즐기고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거기에 몰입할 수가 없었다. 그는 병약한 몸으로 국가의 안전을 위해 전전긍긍해야 했다. 그는 최전선 다뉴브에서 무려 8년 동안을 부하들과 함께 기거하며 적과 싸워야 했다. 그런 노력으로 국가는 안전을 회복하게 되었으나 그는 결국 비엔나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가 쓴 명상록도 말의 안장위에서 틈틈이 떠오른 생각을 쪽지에 기록한 글들이었다.
지도자가 나라를 다스릴 때 아무리 지도력이 뛰어나고 현명하다 해도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면 지도력은 손상 받게 된다는 사실을 역사는 증거하고 있다. 수많은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세상사를 바라보면서 철학자였던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셰익스피어는 그를 가장 고귀한 로마인이라고 했고 율리아누스 황제는 그를 가장 뛰어난 계몽 통치자로 치부하였는데 말이다. 그는 자신의 명상록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남을 원망하고 환경을 탓하는 것은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표징이다. 강한 사람은 문제의 원인을 항상 내부에서 찾는 법이다”
그는 강력했던 로마제국이 점점 약해져 가는 현실의 문제를 내부에서 찾으려 했기 때문이었는지 기독교를 향해 공격의 눈을 돌렸다는 그의 사상의 편린이었던 것인가? 로마가 불안해져가는 원인이 기독교 때문이 아닐까하는 노파심 때문이었다. 그는 로마의 다신론을 섬겼던 자로 유일신을 섬기는 기독교인들을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 다른 종교인들은 위협하면 물러서지만 기독교인들은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협하지 않았다. 이런 행동들이 황제의 심기를 크게 건드렸다. 더 나아가서 든든했던 로마제국의 사방에서 균열의 굉음이 들려왔고, 파르티아를 물리치고 의기양양하게 개선한 장병들은 역병을 옮겨옴으로 국민은 큰 역병에 시달려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역병과 덩달아 가뭄, 기근으로 인한 흉작은 그 피해가 굉장했다. 이런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제국을 혼란케 하는 이유를 크리스천들 때문이라고 여겼다. 국가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황제를 숭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방 총독들에게 명령을 내려 크리스천들을 심하게 다루도록 명령을 내렸다. 특히 리용과 비엔나의 교인들을 닥치는 대로 고문하고 죽이도록 했고, 로마시민권을 가진 기독교인들이라 할지라도 목을 베어 죽이게 했고 시민권이 없는 신자들에게는 짐승의 먹이가 되게 했다. 심지어 시체를 거두어 장례조차 지내지 못하게 했다. 불란서 리용에서는 사방 5인치 정도의 창살이 박혀있는 의자 위에 기독교인들을 강제로 앉혀 피가 줄줄 흘러내리게 하고 그 아래에 숯불을 피워 고통 중에 죽어가게 했다.
황제는 핍박의 무력적 수단을 통해 개종시키려 했지만 그들은 망설임 없이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라는 정체성을 고백하고 순교의 거룩한 길을 선택하여 황제를 분노케 만들었다. 이런 순교의 빨간 피로 땅을 흥건하게 적신 그 땅에서 1170년에 왈도(Waldo)가 태어났고, 이곳에서 멀지 않은 지역에 개혁의 지도자 칼뱅(Calvin)이 태어나도록 섭리하신 게 아닐까?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저스틴(Justinus, 로마의 첫 변증가), 포티누스(Pontinus, 리용의 감독), 블랜디나(Blandina)를 순교의 제물이 되게 했다. 그의 기마상은 지금도 로마 시청의 광장에 햇빛을 받으며 우울한 모습으로 서있다. 기독교를 핍박한 것은 내 생애의 최대의 실수였다고 자인하는 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