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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성경 속의 인물 디베료 황제

한평우 목사 (로마한인교회)

한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의 전 삶을 대신합니다. 흔히 역사가들은 한참 후에 그 사람의 삶의 이면을 시시콜콜 따지며 평가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역사가들이 볼 수 없는 부분을 하나님께서 간과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간단한 이름 뒤에 숨어있는 한 사람의 삶의 편린은 차곡차곡 진실이라는 단어 속에 저장되어 햇빛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디베료 황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역사적으로는 티베리우스(Tiberius BC14-AD37)황제입니다. 그는 예수님과 동 시대를 살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4년을 더 살다가 79세로 세상을 떠난 장수한 황제입니다. 우리나라 이조시대 가장 장수한 왕인 영조가 83세까지 살았는데 그와 버금가는 장수를 누렸습니다. 그는 기원전 42년에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티베리우스는 공화정 말기 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AugustusAD63-AD14)의 대척점에 있었던 안토니우스에게 충성을 바쳤던 클리엔테입니다. 그래서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안토니우스가 악티움해전에서 패하자 정처 없이 도망자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당시 젖먹이였던 디베료를 데리고 시실리로 피했다가 거기서도 불안하여 그리스까지 도망을 갔는데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대 사면령이 선포됨으로 3년 만에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디베료의 어머니 리비아(livia)는 대단한 미인이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미남으로 얼굴이 희고 눈이 한없이 명징했다고 합니다. 고로 그를 바라보는 여인들은 신비함에 빠져들었다고 합니다. 리비아는 첫째를 출산하고 둘째를 임신 중인데도 불구하고 그 미모가 뛰어나서 아우구스투스로 하여금 미혹되게 했습니다. 황제는 직권으로 티베리우스의 아버지에게 아내와 이혼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바람에 헤어져야 했습니다.

황제는 임신 중인 아내를 버리고 티베리우스의 어머니인 리비아와 결혼을 했습니다. 이런 비윤리적 전통이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태리의 총리를 세 번씩이나 역임한 베를루스코니(Berlusconi)는 총리직에 있으면서 아내가 있는 데도 불구하고 젊은 여인들과 음탕한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비록 그 후에 이혼은 했지만 70이 넘은 사람이 지금이 고대 로마인 줄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던 티베리우스는 아버지까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에게로 보내져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양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후계자로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황제의 후계자로 우선순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죽는 바람에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군사령관으로 지도력을 보이기도 했던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로 입적이 되어 황제의 후임으로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딸 율리아와 결혼도 하고 말입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말년에는 거의 나폴리 만에 있는 카프리(Capri) 섬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음으로 티베리우스가 대신 통치를 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AD14년에 탁월했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죽자 56세의 원숙한 나이로 티베리우스가 로마의 2대 황제로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죽으실 때까지, 아니 성령의 강림으로 초대교회가 눈부신 부흥을 이루는 과정을 빠짐없이 보고 받는 기독교사에 특별한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 역시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본받았는지 재위 26년부터 37년(사망)까지 카프리 섬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대신 공포어린 고발정치가 활발하게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오금을 펴지 못하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그는 강한 로마의 초석을 놓았던 현명한 왕으로 역사가는 기술합니다. 하나님의 평가는 전혀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이름 석 자, 그에 합당한 삶을 위해 우리는 고민해야 하겠습니다. 생명책의 이름 석 자 밑에 기록될 나의 진솔한 삶의 기록을 위해서 말입니다. 당신은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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