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우 목사 (로마한인교회)
조선시대의 영조(英祖)는 가장 장수한 임금이요, 그러기에 옥좌를 가장 오랫동안 지켰던 분이다. 그에 대한 잊을 수 없는 것은 아들 사도세자를 그 무더운 여름에 뒤주 안에 넣어 생으로 죽게 했던 무서운 아버지였다는 사실이다. 1760년 영조 36년이 되는 해다. 바로 그 해에 이곳 로마의 중심가 콘도티(Condotti) 거리에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다. 이 중심가 한편에 ‘카페 그레코’가 니콜라 막달레나에 의해 처음으로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이태리에서 두 번째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카페 집이다. 첫째는 베니스의 광장에 있는 카페 휘오린티나(Caffe Fiorentina, 1720)이고.
가까운 거리에 젊은이들의 광장이라는 스페인 계단이 자리하고 있어 명당 중의 명당인 셈이다. 가게는 항상 장소가 중요한 데 그런 점에서 카페 그레코는 혜안을 가진 자의 성공적인 작품이지 싶다. 아무리 좋은 카페 집이라 해도 외진 곳에 위치한다면 누가 찾겠는가! 그리고 그런 외진 곳에 아무리 휘황찬란하게 오픈했다 해도 결코 오래갈 수 없다.
이 고즈넉한 장소는 로마를 찾는 수많은 사람들이 피곤했던 심신을 쉴 수 있는 넉넉한 공간이다. 또한 이곳은 카페 한 잔을 시켜놓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로부터 시작하여 문학이나 음악 및 예술에 대한 얘기를 쉴 사이 없이 나누는 곳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이곳을 찾았던 사람들을 찾아보니 놀랍기만 하다. 시인 중에는 괴테, 바이론, 쉘리, 입센, 스탕달, 키이츠, 고골, 하이네, 마크 트웨인, 음악가로는 리스트, 멘델스존, 바그너, 베를로즈, 비제, 롯시니 등등. 특히 베를로즈는 이곳에서 무한한 음악적 상상력을 얻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또한 베니스에 살고 있던 카사노바도 여기까지 와서 그 찬란한 끼를 선(?)보였다고 한다. 스페인의 왕 후안 카를로스, 모나코의 왕자, 라니에리, 그리고 세상을 들썩였던 다니애나 비, 아마도 이 외에도 더 많을 텐데 하도 많으니 기록하던 사람이 더 이상은 기록할 가치가 없었기에 그만두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역사적인 자리를 방문했다. 로마에 오래 살고 있지만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때 나와는 상관없는 장소가 된다. 손님이 로마에 방문할 때마다 이곳으로 안내하고 이 집이 1760년부터 시작한 카페집입니다. 소개하고 사진을 찍고 카페를 한잔 마시는 것으로 순례를 마치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이 카페의 역사를 살펴보고 크게 놀랐다. 존경하는 분들이 이곳을 들락거렸고 이곳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곳 어디에 그 분들이 앉았던 자리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고 그분들의 체취가 지금도 편린(片鱗)으로 남아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곳에 앉아서 마시면 가격이 조금 비싸다. 그래서 대체적으로 선채로 카페를 마시고 한번 내부를 들러보고 사진을 찍고 가는 것이 전부인데 이제부터는 고즈넉하게 앉아서 카페를 마셔야겠다. 당대를 주름 잡았던 사람들의 체취를 음미하면서 말이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인데 벽에는 온통 그 연륜을 자랑하는 고풍스런 그림들이 걸려있다. 또한 작고 앙증맞은 앤틱의 둥근 탁자들과 그에 맞게 작은 의자들이 맞춤처럼 배치되어 있다. 이 거리는 유명한 명품들의 매장들이 경쟁하듯 들어서 있는 곳인데 이런 곳에서 250년을 버텨 왔다는 것은 놀랍기만 하다. 뚜렷한 역사의식이 없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요즈음처럼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시대에 이곳의 카페 집을 유지한다는 것은 계산상으로는 손해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세상에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들이 있다. 오랜 역사의 흔적들이 손때로 묻어있는 자리, 우리의 위대한 조상들이 아끼던 곳, 이런 곳은 후손들이 어떤 희생이 따른 다해도 지켜내야 하는 역사의 자리가 아닐까 싶다. 주인이 누군지 모르나 칭찬해 주고 싶어진다. 250년 동안 이 자리를 지켜온 정신을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후대에 어떻게 기억되는 삶을 추구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