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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왈도 파의 신앙 파수

한평우 목사 (로마한인교회)

신앙을 지켜낸다는 것은 어렵고 고통스런 일이다. 때로는 목숨을 내어놓아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신앙을 지키겠다는 의지 때문에 포기했는지 모른다. 그럼에 비해 보통 사람은 신앙을 중도에서 포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부자청년이나 데마처럼.

이태리의 북쪽 피아첸자(Piacenza)에 갔다가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 토리노(Turin)를 방문했다. 그곳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왈도파(Peter Waldo, 1170-이태리에서는 발데제라고 함)의 본부가 자리한 곳이다. 현재 작은 도시지만 옛날에는 산자락을 일구면서 살았던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었을 게다. 지금도 저들은 조상들이 물려준 신앙을 유산으로 받아 그 자리를 올곧게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왈도는 불란서 리옹에서 장사로 큰돈을 번 사람이었다. 그는 어느 날 수사를 고용하여 라틴어로 된 성경을 번역하게 했다. 당시는 성경이 라틴어로 되었기에 일반인들은 읽을 수가 없었다. 일반인이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한 것이 1963년이었으니 무려 칠백년 전의 상황은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싶다. 사람들은 사제가 말하는 것을 성경의 말씀으로 알아 순종하는 정도였다. 그러기에 진리를 왜곡하는 일들이 많았다. 이런 정황에서 왈도는 성경을 직접적으로 읽고 싶은 간절한 마음 때문에 성경을 번역하게 했다. 당시로는 위험한 일이었고, 잘못하다가는 화형에 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불어로 번역된 사복음을 읽고 큰 은혜와 감동을 받았다. 그 때부터 오직 성경만이 믿음의 토대가 되고 비록 교황의 말일지라도 인간의 말은 믿음의 매체가 될 수 없다고 간파했다. 그는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의 많은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누가복음 10장에서 주님은 복음을 전하도록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는 말씀을 따라 자신을 쫓는 자들에게도 그 말씀을 지키도록 했다. 그는 모인 무리들을 성경에 명하신 것처럼 두 세 사람씩 짝을 지어 전도자로 파송했다. 실과 바늘, 머리빗, 여인의 장신구, 옷 핀 등등 아주 기본적이고 필요한 것들을 팔아 연명하면서 복음을 전하도록 했다. 저들은 비즈니스가 목적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깊은 산골의 초라한 마을을 가가호호 방문하여 물건을 팔았다. 그러나 목적은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또 다른 물건은 없습니까?’고 물어오면 이렇게 대답했다. “정말로 귀하고 아름다운 보물이 있답니다.” 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이렇게 시작한 복음 운동이 세상을 불붙게 했다. 1270년에 시작한 복음운동, 그것은 돈도 없었고 조직도 없었다. 지원도 없었다. 그런데도 성령께서는 이들에게 강력하게 역사하사 남 불과 스위스, 중부독일,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이태리까지 삽시간에 복음을 이루게 하셨다. 그 운동은 종교개혁자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고, 일부는 지금까지 남아 복음의 씨앗이 되고 있다. 이들을 국가적으로 용인한 19세기 중반까지 이들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삶을 살아야 했다. 이들은 복음을 포기하는 대신 순교의 길을 선택함으로 토리노 계곡으로 흐르는 강물을 빨갛게 물들이는 인고의 세월을 살아가야 했다. 저들은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기까지 무려 6백년 동안을 산속에서 투쟁하며 버텨냈다. 이들의 생활수칙은 오늘날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규칙적인 성경 읽기와 가정예배, 자주 모이는 집회로 영적 신앙을 지켜주는 수단으로 삼는 것이었다. 그들이 모여 예배드렸던 바위굴들은 지금도 우리에게 신앙의 바른 길을 제시하고 있다.

왈도파 장로님은 말한다. 그 옛날 신앙의 유산으로 받은 불란서 언어를 지금도 유지하고 있고, 주일에는 불어로 강론을 듣고 있다고, 무려 600년 동안을 이 전통을 지켜온다고....이들이 과거 숨어 살았던 바위굴은 지금도 신앙의 정체성에 대해 웅변을 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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