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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천등산 박달재

한평우 목사 | 로마한인교회

텔레비전에서 옛 노래가 흘러나온다. 외국에서 듣는 우리 노래는 오페라를 듣는 것하고는 본질적으로 다른 감흥이 인다. 무언가 구수하고 애수가 서려있는 곡이다. 이런 노래를 듣노라면 저 깊은 마음의 밑자락으로부터 알 수 없는 향수가 스멀스멀 솟아난다. 나는 이런 옛 노래의 CD를 차 안에 두고서 아주 가끔 아내와 둘이서 먼 곳에 갈일이 있으면 틀어놓고 깊은 향수의 바다에 빠지곤 한다.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님아...” 나는 이 노래를 잊을 수가 없다. 내 나이 대 여섯 살 때, 아마도 6.25의 치열했던 전쟁이 휴전으로 접어들었을 때이었으리라. 아래 집에 살던 큰 형님 뻘 되던 아저씨가 밤에 놀러오셨다. 무슨 일인지 형님은 그 때 집에 계시지 않았다. 겨울, 화롯불을 끼고 아저씨는 비스듬히 누워 이 노래를 부르셨다. 동네에서 아저씨가 맨 처음 배워 부른 노래였다.

가락이 구슬프기만 했다. 전쟁으로 인한 여파는 깊은 산골까지 영향을 끼쳤고 먹을 것이 열악했던 때였다. 밤에 군것질로 고구마를 날로 먹는다든지 아니면 쪄먹는 것이 유일한 간식이었다. 동족상잔의 치열한 전쟁으로 모든 사람들은 가난과 고통에 찌들어서 소망에 대한 노래를 흥얼거릴 수 없던 시대였다. 웬일인지 아저씨는 그 밤에 유난스럽게 구슬픈 억양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 때 한번 듣고 외운 유일한 유행가가 바로 천등산 박달재였다.

나는 반세기 이상을 가끔씩 이 노래를 흥얼거리면서도 천등산 박달재가 어디에 있는 지, 혹은 가상의 지명인지도 관심도 없었고 알지도 못했다. 그러던 중에 어느 날 이상스레 천등산에 대해 관심이 일어나게 되었다. 요즈음에는 아주 편한 세상이다. 컴퓨터에 알고 싶은 것을 입력하기만 하면 즉시 원하는 수많은 내용들이 올라온다. 인터넷에 클릭을 했더니 천등산 박달재에 대해 친절하게도 사진까지 보여준다. 충북에 있는 해발 2000미터의 깊은 산으로 애절한 내력이 전해 온다고 한다. 노랫말도 이런 내력을 바탕으로 쓰였고....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는 청년이 천등산의 박달재를 넘게 되었다. 청년은 박달재의 주점에서 하루를 묵어가게 되었다. 청년은 잠이 오지 않아 밖으로 나왔는데 마침 처녀도 밖에 나왔다가 총각을 만나게 되었고 두 사람은 첫눈에 반하게 되었다. 총각은 만사 제쳐놓고 아름다운 처녀 곁에 있고 싶었다. 그러나 처녀의 간절한 요청으로 할 수 없이 과거를 보러 한양의 먼 길을 떠나게 되었다. 기다리라는 간곡한 부탁을 남기고 떠난 청년. 그 때부터 처녀는 저 산 아래를 바라보며 사랑에 빠지게 만든 총각이 장원급제하여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그런 기대와는 다르게 총각은 과거에 떨어지고 말았다. 자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초라한 실상을 보일 수 없었다. 그래서 돌아가는 길을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다.

한편 손꼽아 기다리던 처녀는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총각이 변심한 줄 알아 그 높은 고개에서 몸을 날렸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총각도 처녀가 몸을 날린 곳에서 역시 몸을 날렸고, 그래서 가사는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님아”라고 노래한 것이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지순한 이름 때문에 젊은 두 사람은 살 의미를 잃어버렸고 그 결과는 쉬운 결단을 하고 말았다.

천등산 박달재. 내가 처음 배운 노래요, 결코 잊을 수 없는 지고지순한 두 사람의 이룰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랑을 노래한 것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 고개를 넘는 사람들마다 그 추억의 돌비 앞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죽는 것보다, 사랑하기 때문에 살아서 끈질긴 사랑의 탑을 쌓아가는 자들이 일어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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