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우 목사 | (로마한인교회)
조선시대에 옹주가 죽은 남편을 사랑하여 스스로 먹기를 거절하고 목숨을 끊어버린 드문 사건이 있었다. 이런 일은 당시로는 아주 희귀한 일이다. 임금의 딸은 한 마디로 지체가 얼마나 높은지 그와 결혼하는 남자(부마)는 절대로 바람을 필 수 없었고, 그 당시 문화에 흔하기만 했던 첩을 들이는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또한 부마는 아내가 죽어도 재혼을 할 수 없고 재혼을 한다 해도 그 아내는 첩의 신분으로 있어야 했다. 또한 남편의 집안이 대역죄에 연류되어 풍비박산이 난다해도 그의 아내 된 공주는 왕녀의 신분이 보장되었다. 행여 시어머니가 왕녀에게 시집살이를 시켰다는 소문이 궁궐에 들어가기라도 하는 날엔 목숨은 부지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시대를 살았던 왕녀 중에 아주 특이한 분이 있다. 그 분이 바로 조선시대에 가장 장수했던 영조의 큰 딸 화순옹주(和順翁主)다. 그녀는 정빈 이씨의 소생이다. 옹주라 함은 정실 소생이 아니라 후실 소생임을 의미한다. 그녀는 후실의 둘째로 태어났지만 언니가 일찍 죽었기에 장녀가 되었다. 영조 자신은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나 용상을 넘볼 수 없는 정황이었지만 숙종의 아들인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어부지리로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정상적으로는 임금의 장자로 태어나 세자로 책봉되어 오랫동안 교육을 받고 임금이 되어야 하는데 어부지리로 되었으니 소위 가문 좋은 신하들이 얼마나 입을 삐죽였을까 싶다. 저 사람은 왕이 될 수 없는 천민 무수리 출신인데.... 그러므로 그는 정실부인을 통해 아들을 낳아 여봐란 듯이 세자로 세우고 싶었다. 그러나 인력으로 할 수 없는 일, 그래서 그는 화순옹주를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지 싶다.
그런 딸을 영조8년(1732년)에 영의정 김홍경의 13살 난 아들 김한신에게 시집을 보냈다. 그의 묘가 충남 예산에 있는 것을 보아 시집이 충청도 예산이었던 같다. 부마 김한신은 오위도총부 도총관과 제용감제조를 역임했는데 글씨를 잘 썼고 시문에 능했다고 한다. 그래서 애책문이나 시책문을 많이 썼고 또 도장을 잘 새겨 임금의 도장을 새기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1758년 건장하던 남편 김한신이 서른여덟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자식도 없이 유일하게 의지하던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그녀의 슬픔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곧 남편의 뒤를 따르기로 결심하고 곡기를 끊어버렸다. 그 후부터 입에 물 한 모금도 대지 않았다. 이레 되던 날 이 소식이 임금 영조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영조는 임금의 체면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하는 딸의 거처를 찾아갔다. 그리고 친히 미음을 먹도록 권했다. 옹주는 용포를 벗고 먼 길을 달려온 임금인 아버지가 수저로 떠먹여주는 미음을 거절할 수 없어 몇 숟가락 뜨는 듯했지만 그것들을 이내 토해 버리고 말았다. 옹주는 결국 열 나흗날 만에 목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나는 이 사실을 읽으면서 세상의 이목을 집중케 한 영국의 황태자 다이애나 비에 대한 생각이 오버랩 되었다. 그녀는 옹주와 비슷한 나이에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이유로 맞불 작전을 펴다가 파리에서 자동차 사고로 젊은 나이에 연인과 함께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옹주나 다이애나 비는 막강한 힘과 인기를 지녔던 당시 선택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그 자리를 이용하여 쉽게 변하는 사랑에 목을 매지 말고 다른 방향으로 눈을 떴으면 어떠했을까? 옹주는 아버지 영조의 힘을 빌려 고통당하는 마을 사람들을 구제하고 돕는 길을 걸어갔다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싶다. 마침 영조가 장수한 왕이었기에 그 튼튼한 후원자로 유감없는 선을 죽을 때까지 베풀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랬다면 그를 통해 지엄한 왕실과 평민을 소통케 하는 선각자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많은 백성들은 그녀의 헌신으로 행복을 공유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옹주는 삶의 이유가 무수하게 많았는데 그것을 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그런 딸을 영조는 괘씸하게 여겼기에 옹주에 대해 열녀문을 세워주어야 한다는 무수한 상소문들을 짐짓 모른 체했다. 그리고 옹주에 대한 열녀문은 손자 정조가 세워주었다.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우리에게 너무도 중요한 삶의 문제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