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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정순왕후의 눈물

한평우 목사 (로마한인교회)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연을 머무는 곳에 잔재로 남긴다. 고로 어디든 사연이 없는 곳은 없다. 다만 사연을 남긴 자의 신분 여하에 따라 그 자리가 역사적으로 기억되던지 아니면 기억되지 않을 뿐이다.

로마의 콜로세움을 지나다가 어느 여인이 자꾸만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보았다. 그의 오른 편에는 대여섯 살 남짓한 꼬마가 엄마의 손을 잡고 따라가면서 움칫 움칫 엄마의 얼굴을 훔쳐보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 광경은 마음을 찡하게 했다. 길을 가면서 눈물을 훔치는 일은 이상스레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다. 콜로세움 맞은편에 거대한 네로 황제의 궁터인 도무스 아우레아가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네로를 그처럼 사랑했던 그리스계 노예 클라우디아 악테. 자신의 낮은 신분으로 황제를 대 놓고 사랑할 수 없어 마음 저 깊은 곳으로 삭여내려야 했던 여인, 결국 네로가 자살로 삶을 마무리하는 현장에서 그의 몸을 부둥켜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려야 했던 불행한 여인의 슬픔이 어우러진 자리이기에 그런지 모르겠다.

이 시점에서 단종의 비 송씨, 후에 복권되어 정순왕후가 된 비극의 여인이 기억되었다. 그녀는 사육신들의 단종 복위운동이 누설됨으로 단종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 했다. 이제 17살 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요, 살려달라고 그토록 애원하는 조카를 말이다. 잘못된 권력 의지 때문에 단종의 비 송씨는 평생을 피눈물을 뿌리며 살아가야 했다. 더더구나 사육신들의 단종 복위 운동이 탄로남으로 그의 신분은 관비로 전락했다. 그때 신숙주는 단종의 비 송씨를 자신의 노비로 달라고 주청했다니 인간이 얼마나 악할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결국 세조는 그건 너무한다 싶었던지 “그는 노비지만 노비로서의 사역을 할 수 없게 하라”고 함으로 새파랗게 젊은 그녀는 수절의 뜻을 펼 수 있었다. 그 후 송씨는 18살의 새파란 나이로 동대문 밖 정업 원으로 가서 일생을 소복을 벗지 않고 살았다. 그녀는 아침 일찍 남편의 유배지 강원도 영월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통곡을 쏟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조정에서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던지 그에게 필요한 양식과 옷감을 보냈지만 그녀는 손도 대지 않았다. 시중들던 시녀들이 집집마다 돌면서 동냥한 음식으로 연명했다. 이런 사정을 아는 마을 사람들이 그의 집을 오가며 몰래 곡식을 문간에 놓아주기도 했고 또는 시장을 가는 척 하고 살며시 울안에 양식을 던져 넣어주기도 했다. 그에게 가까이 하지 말라는 세조의 지엄한 명령이 살아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녀는 명이 길어 82세까지 살았다. 그래서 세조-예종-성종 때까지 살면서 권력욕에 미친 세조의 후예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두 눈 부릅뜨고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친정마저 멸족을 당해 후환을 염려할 것이 없었기에 조정에서도 더 이상 손을 대지 않았다. 고로 그녀는 살면서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가 스무 살에 요절하여 세조가 땅을 치며 슬퍼하는 모습도 지켜볼 수 있었고, 세조의 둘째 아들 예종의 비 장순왕후(한명희의 셋째 딸)가 아들 안성대군을 낳고 이듬해인 17세에 산후병으로 모자가 세상을 떠나는 것도 부릅뜬 눈으로 지켜 볼 수 있었다.

송씨가 매일 새벽 뒷산 동망봉에 올라가 원통하게 죽은 남편 단종을 향해 드리는 통곡이 한양을 흘러들어 세조가 뿌린 씨앗들을 거두도록 한 것인지 모른다. 한 여인의 눈에 피 눈물을 흘리게 한다는 것, 그 것이 한으로 차곡차곡 쌓일 때 이 세상에서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일까? 그래서 그런지 세조의 후예들 중에 탁월한 임금이 나올 수 없었는지 모른다. 그 후 송씨는 숙종 때에 신분이 복원되어 정순왕후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길지 않은 삶에서 이웃과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일까 싶다. 우리는 과연 이런 참된 관계를 위해 힘쓰고 있는지 살펴보아야겠다. 콜로세움 길가에서 흘리는 여인의 눈물이 일시적 감상의 몸짓이기를 염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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