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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어거스틴을 추억하며

한평우 목사 (로마한인교회)

도시의 중요성은 옛날이나 현재나 어떤 위인이 출생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짤스부르그에 가보면 아주 작은 곳이지만 그 곳에서 천재 음악가 모짜르트(1756-1791)가 출생했다는 것 때문에 몰려오는 수많은 관광객들로 인한 부가가치는 상상하기 힘들다.

로마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위인들을 배출했지만 기독교인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 있는데 그 분이 바로 어거스틴(Agustine354-430)이지 싶다. 그는 요즈음 난민으로 구라파를 힘들게 하는 튜니지(북 아프리카)의 타가스테(Thagaste)라는 소도시에서 태어난 베르베르 족으로, 로마를 위협했던 한니발의 후예이다. 아버지는 작은 마을의 의회 의원이었다. 그는 371년에 칼타고로 유학을 갔다. 그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는데 아들을 출세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는 거기서 당시 유행이었던 웅변과 수사학을 배웠고 그는 수사학과 언변에 능통하게 되었다. 또한 키케로의 철학 권장을 위한 책 호르텐시우스(Hortensius)을 탐독하고 철학을 사랑하였고, 수사학에 두각을 보여 그 방면에 성공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목적이 없는 성공은 그를 방탕으로 이끌어 가게 되었다. 그는 행실이 좋지 못한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쾌락을 탐닉하는 젊은이가 되었다. 그리고 한 여성과 동거하여 18세에 아들을 출생하기도 했다. 그의 신앙은 점점 희미해져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는 점점 뜨거워지게 되었고.... 그는 당시에 유행한 페르시아에서 전파된 마니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그는 마니교에 대한 잘못된 진리를 검증한 후 29세가 되어서야 떠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영적 공허함 중에 로마의 수사학 교사로 취직이 되어 그곳으로 갔다. 그는 꿈에 그리던 로마에서 학문과 문화의 높은 수준에 감명을 받으면서도 지식인들이 검투사 시합 같은 퇴폐적인 쾌락 문화에 탐닉하는 것을 보고 지성인도 부패한 본성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런 중에 어거스틴은 밀란의 수사학 교사로 승진하게 되었다. 또한 거기에는 수사학의 대가이자 웅변가요, 진리를 파수하는 영적 리더였던 주교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40-397)가 있었기에 만나고 싶은 열정이 컸다. 어거스틴이 영적으로 공허함으로 인해 고통당할 때 알리피우스와 몇 몇 사람들이 모니카를 중심으로 신앙의 공동체를 구성하였다. 칼타고 출신들이 모이는 영적 모임이었다.

그런 중에도 어거스틴은 내면의 정욕을 이길 수 없는 자신을 돌아보며 철학과 교육의 한계를 깨닫고 바울 서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로마서 5장과 7장을 통하여 영적인 도전을 받았지만 쾌락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결국 자신이 하는 일에 사표를 내고 친구와 사촌들과 함께 가시키아쿰(Cassiciacum)으로 갔다. 고통스러운 심신을 좀 쉬어 보려는 심정으로. 답답하여 정원으로 나온 그에게 담 너머로부터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가 들려왔다. 이 단순한 노랫말이 어거스틴의 마음을 강타했다. 그는 성경을 폈다. 그의 눈이 머문 곳은 롬13;12-13절의 말씀이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그 날이야말로 기독교의 역사를 바꾸어 놓게 한 386년 8월 늦은 여름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바울 사상을 잘 이해했고, 바울의 은혜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16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수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는 바울처럼 하나님의 강권적인 부르심에 의해 돌아온 사람이었기에 누구보다도 바울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루터나 칼뱅 같은 개혁자들도 그의 영향을 받았고 이 시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에 대해 빚을 지고 있다. 한 사람의 진정한 변화, 그것은 실로 엄청난 결과를 이루게 된다. 하나님은 지금도 변화 받은 사람을 찾으신다. 그렇다면 당신은 변화 받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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