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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이제 걱정 없어요

한평우 목사 (로마한인교회)

서울에서 있었던 큰 아들 결혼식에 누님 아들인 외조카가 찾아왔다.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누님의 셋째 아들이었는데 공부에는 재주가 없어서 시원찮은 학창시절을 보냈었다. 학교전학 때 도와주기도 했었고. 우리나라의 정서상 명문대학을 나오지 않을 때 기대치가 그만큼 적다하겠다. 조카 역시 어찌해서 밥이나 먹을까 하고 친지들은 염려의 눈길로 바라보아야 했었다. 해외에 살고 있기에 그동안 뵙지 못하던 누님은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마지막 순간에 나를 그리도 찾았다는데.

누님이 안계시니 조카들과도 자연스레 멀어지는 것 같다. 더더구나 해외에 있어 만나기도 쉽지 않으니 더 그런 것 같다. 조카는 오랜만에 만난 내게 자신의 처지를 빠르게 설명한다. 결혼식이 끝나고 참석한 분들에게 인사를 하러간 내게 말이다. 그는 내가 바쁜 것을 잘 알고 있으니 거두절미하고 자신의 성공담을 짧게 수식어를 빼고 빠른 어조로 말했다. “외삼촌, 나는 이제 걱정 없어요, 나도 두 번이나 부도를 맞았는데 이제 일어섰어요, 중국에도 공장을 하나 가지고 있고요, 형님의 조카들도 모두 제가 데리고 있어요.”

그는 주변에서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던 조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했음을 힘주어 말한다. 여러 가지 아주 열악한 상황에서 말이다. 한 마디로 맨 땅에 헤딩한다는 식으로 일군 기업이겠다 싶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조카가 한 말 가운데 “이제 걱정 없어요”라는 말에 문득 향수가 젖게 되었다.

어머님은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오남매를 맡아야 했다. 밭뙈기 하나 없는 처지에서 말이다. 할아버지 때는 땅이 많은 유지였고 당신의 눈으로 그 풍성한 것을 보고 경험하다가 어느 날부터 하나하나 팔려나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싶다. 특별히 아끼시던 기름진 밭이 팔려나갈 때 하염없이 먼 산을 바라보시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아야 했을 때 그 허망한 마음을 형언할 수 없었다고 하시던 어머님의 말씀이 지금도 귓전에 뱅뱅거린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공부 많이 한 삼촌에 대한 희망은 굉장한 것이었다고. 그런데 그 삼촌마저 육이오 전쟁으로 돌아가셔야 했으니 그 무너지는 슬픔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 싶다. 그 후 갑자기 몸서리쳐지는 가난의 굴레를 걸머지고 어머니 홀로 감당해야 했으니 얼마나 가혹한 시련이었을까 싶다.

어릴 때 우리 집은 혼자 사는 과수댁이어서 동네 아줌마들이 많이 놀러오곤 했다. 저들은 흐릿한 등잔불 곁에서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다. 책을 많이 읽는 것도 아니고 공부한 분들도 아니기에 새로운 이야기꺼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도 저녁식사만 마치면 우리 집으로 동네아주머니들이 찾아왔다. 그리고 밤이 맞도록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는 대부분 누가 먹고 살기 좋아졌다, 누구는 망하게 됐다, 누구는 시집을 잘 가게 되었다, 누구는 서울에서 취직이 되었다는 등등의 이야기였다. 어머님은 대화 중 누가 걱정 없게 되었다는 말이 나오면 언제나 입술에서 바람이 불듯 치이-- 하는 소리를 내시곤 했다. ‘치이’라는 의미는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아마 부러울 때 내는 소리라고 느껴졌다. 그 당시만 해도 배가 고팠던 시절이었기에 누가 밥을 걱정 없게 먹게 되었다는 소리만 들으면 어머니는 어김없이 “치이”라고 입에서 센 바람을 내시곤 하셨다.

어릴 때 등잔불 밑에서 들었던 그 친숙한 말을 까맣게 잊어버렸는데, 참으로 몇 십 년 만에 조카로부터 이제 걱정 없게 되었다는 그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 소리는 나의 깊은 심연에 각인되었던 소리였고 결코 잊을 수 없는 음성이었다. 아마도 이 자리에 어머님이 곁에 계셨다면 “치이--”하고 무성음의 바람소리를 내셨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지금 어머님은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조카의 말에 “치이”라는 무성음 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에 저며 온다. “이제 걱정 없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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