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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우리라는 이름

한평우 목사 (로마한인교회)

“우리”라는 인칭대명사는 몸으로 와 닿는 의미가 크다. 요즈음 월드컵으로 온 세상은 축제로 들뜨고 있다. 우리도 엊그제 16강에 들어갔고 또 8강전의 경기에 온 국민이 목청껏 대-한 민국을 외치기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8강전에서 아쉽게 탈락한 뒤부터는 하루아침에 축구에 대한 열기가 싹 식어버렸다.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말이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나 자신도 놀라울 정도다.

월드컵을 보기 위해 우리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태리에서는 특별한 방송에서만 월드컵을 중계하기 때문에 한 성도가 월드컵을 볼 수 있도록 헌신을 했고, 접시 안테나도 사다가 달았다. 카드를 사서 꽂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축구경기를 관람하는 분들을 환영하니 원하는 분들은 교회로 모여 함께 응원하자고 말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얼마나 기대가 부풀었는지 모른다.

우리가 16강에 당당히 들어가게 되었을 때, 얼마나 흥분되고 심장이 벌름벌름했는지 모른다. 흥분으로 요란한 가슴을 쓸어내리기 그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런데 지금 8강전에서 떨어지고 나니 삽시간에 축구에 대한 열기와 관심은 썰물처럼 흘러가버리고 말았다. 그 탈락하는 순간부터 언제 그랬느냐는 듯 마음은 한없이 냉정해졌고 월드컵 방영에 무관심하게 되었다. 이것이 나만의 감정은 아닌가 보다. 교회에 설치한 대형 텔레비전을 보러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꼭 명절의 떠들썩하던 순간이 지난후의 그 쓸쓸한 순간처럼.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우리라는 의미의 함축하는 그 열정이 우리 외의 영역으로 떠나게 되는 순간의 무덤덤함. 어쩌면 6.25전쟁이 우리에게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 아픔이지만 상관없는 나라 사람들에게는 까마득한 먼먼 역사의 흑백 사진인 것처럼.

우리가 요즈음도 신문지상을 통해 보는 중동의 아픔들이 먼먼 나라 이야기로 느껴오는 것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라는 낱말은 한없는 이기주의의 발상으로 뭉친 단어요, 극한 편협주의를 상징하는 단어가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지금 텔레비전에 열중하여 8강이나 4강에 침을 튀기면서 토론하고 어느 팀이 승리하겠는지에 대해 예견하고 뛰어난 선수에 박수를 보내야 한다.

그런데 그처럼 축구에 대해 요란하고 흥분하기 좋아하는 이태리는 연일 조용하다. 지금 쯤 밤마다 열린 창문을 통해 함성과 탄식으로 밤을 지새워야 할 텐데 말이다. 교회 근처 대로에 걸려있는 월드컵 출전국들인 32개국의 국기가 아직도 펄럭이고 있고, 곁에는 이태리 주장이 월드컵에서 챔피언에게 주는 컵을 두 손으로 높이 들고 환호하는 사진이 걸려 있는데도 말이다.

이제는 월드컵은 남의 나라 잔치에 불과하다는 듯이 32개 나라의 펄럭이는 깃발들 중 탈락한 나라들 국기는 고개를 숙인 듯 말이 없다. 우리란 극히 제한된 너와 나의 사이를 의미하는지, 또는 순전이 나 자신, 우리 국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라는 의미를 통해 느껴지는 감정이 나를 더욱 고독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 언제 “우리”라는 울타리가 이웃 사람들에게까지 넓혀질까 싶다. 그 때가 될 때 진정한 공동체가 이루어지지 싶다. 내 마음에 동조한다는 듯 월드컵 참가국 국기들이 말없이 펄럭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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