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한인교회
이태리 역사를 살펴보면 가문들의 경쟁은 대단했다.
선의의 경쟁이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상대방을 제압하고 패권을 손에 쥐려는 전투적투쟁이었다. 로마에서는 콜론나와 오르시니 가문, 작은 도시 아시시에서도 네피스와 휘유미 가문이 늘 대결하였기에 성 프랜시스는 평화를 줄기차게 외쳐야 했다.
피렌체에서 은행업에 종사하던 피치(Pizzi) 가문은 후발 주자인 메디치 가문이 실권을 쥐고 독단적으로 통치하자 불만을 가졌다. 그런 상황에서 교황 식스투스 4세는 이몰라를 매입하기 위해 메디치 가문에게 돈을 빌리려고 했다. 결국 거절당했는데 그 이유는 이몰라가 피렌체와 베니스의 교역로에 있었고 메디치 가문도 매입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피렌체 대주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메디치의 실권자 로렌초는 자신의 처남을 그 자리에 임명해주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거절당했는데 이유는 피사와 피렌체를 병합하려는 교황의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황은 대주교 살비아티를 그 자리에 임명했다. 그러나 절차상의 문제를 이유로 로렌초가 부임을 거부하자 살비아티는 로마에서 3년 동안 세월만 허송해야 했다. 이런 일로 앙심을 품게 된 교황은 메디치 가문을 몰아내고 자신의 조카를 그곳의 군주로 세우고자 음모를 꾸몄다. 전혀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이스라엘을 침공한 하마스의 작전처럼...
1478년 4월 26일, 1만 여명의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피렌체의 대성당에서 미사가 한창 진행되던 중에 음모를 실행했고, 메디치 형제가 공격을 받아 줄리아노 메디치는 줄리어스 시저처럼 온 몸이 칼에 찔려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으나 형 로렌초는 극적으로 탈출했다. 이런 잔인한 상황을 목격한 피렌체 시민들은 흥분하여 공모자들 80여명을 그 자리에서 붙잡아 처형했고, 주동자 살비아티 대주교도 높은 창문에 목을 매달았다. 또한 콘스탄티노플로 도망쳤던 주동자도 몇 년 후에 소환하여 처형했다. 거사가 실패하고 자신이 신임하는 추기경까지 잔인하게 처형당하자 교황은 크게 분개했다. 그래서 복수하기 위해 나폴리와 동맹을 맺었고 주변 도시들을 동원하여 피렌체를 침공했다. 피렌체에 성무 금지를 선언했고...
피렌체의 존망이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자, 로렌초는 우방국인 밀라노나 볼로냐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자국의 사정으로 어려웠다. 피렌체는 이미 많은 전투에서 패했고, 국토는 황폐하고, 도적들이 횡행하고 역병까지 찾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로렌초는 죽기를 각오하고 혈혈단신, 배를 타고 적진 나폴리를 찾아갔다. 그리고 음흉한 나폴리의 왕 페르디난도와 협상을 벌였다. 무려 석 달간을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과 탁월한 외교적 수완을 동원하여 교황의 잘못된 통치에 대하여 설득하였고, 결국 강화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교황은 나폴리의 배신으로 목표를 이루지 못하게 되어 기분이 상했지만 성무금지를 철회하고 피렌체와 평화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이 일로 로렌초는 일약 피렌체의 영웅이 되었고 강력한 통치를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정치적인 상황을 통해 은행업의 한계를 느낀 로렌초는 아들을 추기경으로 세우고자 결심했다. 한편 교황 식스투스 4세가 1484년 선종하자, 로렌초는 유순한 키보 추기경을 교황 후보자로 후원하였다. 결국 그가 교황에 뽑히게 되었으니 바로 인노센트 8세다. 로렌초는 메디치 가문의 15살 된 막달레나를 38살인 교황의 사생아 키보와 정략결혼을 주선했고 두둑한 지참금도 잊지 않았다. 이런 노력으로 로렌초의 차남 요한이 16세에 고대하던 빨간 모자를 착용하는 추기경에 서임될 수 있었다.
그가 바로 똑똑하기는 하나 최고로 사치스러웠다고 평가받는 메디치 가문의 첫 번째 교황 레오 10세다. 그는 교황이 되자 부모 없이 불쌍하게 성장한(파치의 음모로 죽은 로렌초 동생의 사생아), 조카 줄리아노를 추기경에 서임하였고, 후에 그는 추기경들의 꽃인 상서부원장(교황청의 재정 담당)이 될 수 있었다.
그 당시 정부(精婦)의 자식은 추기경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출생부터 미적지근한 자를 하나님의 대리자의 후보인 추기경에 보임하는 것은 양심이 저당 잡혀야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가문을 일으키려는 거대한 욕망에 양심이 끼어들 수 있는 자리는 없었을 터! 추기경이 된 그는 후에 클레멘티 7세 교황의 자리까지 꿰차게 되었다. 그는 메디치 가문을 견고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교황 좌를 꽉 움켜쥐었다. 쥐가 나도록, 그뿐만 아니라 그는 전통을 까부수고 교황 최초로 수염까지 길렀다. 위대한 메디치 가문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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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1.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