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한인교회
신앙의 백미는 노년의 삶을 통해 조망할 수 있다. 아무리 젊을 때 신앙에 열심이었다 해도 죽음이 가까울 때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떤 이는 그 사람의 관 뚜껑을 덮기 전에는 평가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조석 변으로 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영적으로 대단한 삶을 살았던 선배들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저들의 이름을 들어 자신의 정체성을 변호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더 나아가서는 나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시므로 저들이 지금도 살아서 하나님을 뵈옵고 있는 존재임을 증거 하셨다. 모두가 자신의 신앙을 자랑하지만, 저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인정하셨고 두둔하신 자들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 이제 살아갈 날보다 죽을 날이 가까워옴에 따라 새삼 저들의 삶이 부러워진다.
그런데 이 세 분의 삶을 좀 더 들어가면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브라함은 137세에 사랑하는 아내 사라를 작별해야 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후처를 얻었고(창25;1), 그에게서 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과 수단을 낳았다. 후처에게서 얻은 자녀들은 대부분 믿음과는 상관없는 길을 간 자들이었다. 후손들 중에는 앗수르도 있다. 그리고 38년이라는 세월을 더 살다가 죽었다. 놀랍게도 그 기간 동안의 삶에 대해서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그 다음 이삭은 약속의 아들이요, 아브라함이 100세, 아내 사라가 90세에 얻은 아들이다. 아내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 상황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난 아들이다. 그런 놀라운 은혜로 태어 낳고 세 사람 중에 가장 오래 산 이삭이나 성경은 간단하게 기술했고 우물을 몇 개 팠다는 기록 밖에는 주목할 게 없다. 그가 늙어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되자, 늙은이에게 식탐이 강하게 되는 것처럼 이삭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에서를 불러 별미를 부탁했다. 이제 내가 죽게 되었으니 활을 가지고 들로 가서 짐승을 사냥하여 별미를 만들어 먹게 하라고 했다.
그것도 양떼가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들짐승을 잡아 별미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들짐승은 기름이 적고 담백하기 때문에 양고기와는 별미였기 때문이었으리라. 늙은이에게는 좀 더 맛있는 음식에 대한 본능적 식탐이 왕성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네가 잡아온 짐승으로 요리한 별식을 맛있게 먹고 하나님의 예언과는 반대의 길을 가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이다. 영적으로 어두워지니 하나님의 예언까지 잊어버리고 말았다. 놀라운 것은 이삭은 그 후로 43년 동안을 더 살았고(180세) 셋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 그 43년 동안의 긴 세월을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
그 다음 야곱을 조명해보면, 그의 노년은 영성으로 충만했다. 세 사람 중에 훨씬 적은 147세를 살았지만 아브라함이나 이삭에 비해 그의 노년은 찬란했다. 짐승에게 찢겼다고 슬퍼하던 아들 요셉이 살았고 당시 강대국가인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놀라운 시식을 듣게 되었다. 요셉이 보낸 수레를 보고야 진실임을 알았고, 그 수레를 타고 풍요로운 고센 땅으로 70여명의 식솔들을 이끌고 이민을 떠났다.
요셉은 당시 애굽의 2인자이었다. 절대적 권력을 손에 쥔 아들이 통치하는 애굽으로 갔으니 야곱의 욕망은 펄펄 끓어올랐을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매일 온갖 진기한 음식으로 배불리려하고 수많은 아름다운 후처에 눈독을 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구절은 성경에 없다. 그는 그곳에서 17년을 살았고 이내 수명이 다했다는 사실을 알고 아들들을 불러 축복하였고 자녀들의 앞날을 예언해주었다.
요셉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두 아들을 데리고 왔다. 두 아들로 하여금 눈이 어두운 아버지에게 입을 맞추어 인사드리게 한 후 그들을 물러나게 한 후, 땅에 엎드려 아버지께 큰 절을 드렸다.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제국의 2인자가 늙고 초라한 아버지 앞에 큰절을 드리는 모습을 그려보면 눈물이 난다.
그 후 두 아들의 머리에 안수하도록 아버지의 오른손을 이끌어 장자 므낫세의 머리에, 그리고 왼손을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어드렸다. 그런데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는 야곱은 손을 엇바꾸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요셉이 손을 바꾸도록 말씀을 드렸다. 그 때 비록 눈은 볼 수 없었지만 영성은 한 없이 밝았던 야곱은 말했다.
나도 안다, 나도 안다. 그러나 장자보다 차자가 더 큰 자가 된다. 요셉의 영성은 어두워졌지만 야곱은 밝아졌다. 기력이 쇠약한 상황에서 침상에서 꼿꼿하게 일어나 두 손자를 축복했고, 자신의 시체를 이스라엘 땅 조상의 무덤에 장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살기 좋은 고센 땅에 산다 해도 약속의 땅이요, 영원한 도성을 그리워했음을 의미한다. 마지막이 더 아름다운 야곱의 영성, 그 노년의 야곱의 찬란한 영성을 본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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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0.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