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힘, 행복과 불행, 성경과 기준–
세상에서 행복, 불행
삭개오는 '의로운 자, 청결한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축복 속에 태어난 인생이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삭개오의 삶은 그의 이름과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는 세상과 등을 돌리고, 자신의 양심과 인격을 팔아가며 안면 몰수하고 돈 버는 데 목숨을 걸었다. 아름다운 도시, 여리고의 세리장이가 되어 부와 권력을 손에 쥐었지만, 그 대가로 그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스스로 파괴하며 불행하고 외로운 길을 걸었다.
그런데 일상적인 관점에서 그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단정하지만, 과연 그는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성경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는 반드시 불행하고, 불행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삭개오의 길을 걸어가고 있고, 또 걸어가기를 원하고 있다면, 그는 정말 불행한 사람이 맞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삭개오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했을까? 세상에서 그는 "잘나가는 사람"으로 보였으며, 자신이 이룬 성공에 자부심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셨듯,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다. 돈이 그의 삶의 중심에 있었던 순간,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인생이 되지는 못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삭개오보다도 더 냉혹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보니,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가치관 속에서, 사람들에 대한 안면몰수와 양심의 부재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아 보인다. 돈만 있다면, 세상은 우리의 가능성을 끝없이 열어주는 것처럼 보인다.
상실한 영혼, 영감성
그러나 삭개오의 마음을 이해하는 관점을 조금 돌이켜 본다면, 새롭게 해석이 될 수 있다. 여리고 성에 오신 예수님은 단 한 명의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 그곳에 오셨다. 세상은 삭개오를 세상에서 누구나가 부러워할 만한 성공한 사람으로 보았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그는 길 잃은 한 영혼이었다. 삭개오는 외로웠고, 그의 영혼은 공허했다. 이는 그가 스스로 고백하지 않았더라도 명백한 사실이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명백한 이유가 있다. 그는 분명히 세상이 부러워할 재력과 권력을 가졌지만, 한마디로 그는 주님이 찾으시는 잃어버린 영혼, 주님이 택한 영혼이었기 때문이다. 주님이 택한 영혼은 그들만의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영적 감수성의 더듬이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세상의 것으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영혼의 갈망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세상의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그들 안에 내적 갈망이 있다. 죄를 지으면서 회개할 걱정부터 한다. 죄 가운데서, 결코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한다. 하나님과 멀어진 상태에서 늘 찜찜함을 느낀다. 삭개오 역시 주님이 찾으시는 택한 영혼이었기에,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에 오르는 수치를 감수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주님이 한번도 명령하지 않은 일을 결단한다.
그동안 자신의 삶의 가장 큰 존재 이유였던 바로 그것을 포기하고 기꺼이 내려 놓는다. 가난한 자를 위해 절반을 내어 놓고, 토색한 일에 대해서는 4배를 갚겠다고 한다. 거의 자신의 소유 전부를 내어놓는 일이었다. 이제 자신의 곳간은 텅텅비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곳을 예수님으로 채웠다. 예수님이 찾으시는 잃어버린 영혼이 주님 눈에 발견되자 나타난 기적같은 일이다.
신앙의 성숙, 변화된 시선
신앙의 성숙이란 이렇게 예수님을 통해 자신을 보게되고,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고백하며, 자신의 삶의 주인 되었던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으로 자신의 영혼을 채우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세상의 기준에서 바라보던 모든 일들을 주님의 눈, 성경의 기준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삭개오와 같은 세상에서의 성공자에 대해서도, 주님의 눈으로 볼 때는 한없이 불쌍한 구원받아야할 잃어버린 한 영혼임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의 화려하고 좋아보이는 시선 때문에, 관점과 기준을 바꾸지 못한다면, 택한 영혼은 궁극적으로 구원에 이르겠지만, 그 과정은 심히 허망하고 공허할 따름일 것이다.
우리는 신앙을 통해 자신의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변화시켜야 한다. 세상은 죄를 미화하고 박수치며 응원하지만, 하나님의 시선은 다르다. 예컨대, 최근 유명한 영화배우가 결혼하지 않은 채 아이를 낳았을 때, 이를 회피하지 않고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감당한다고 했을 때, 세상은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냈지만, 성경은 이를 죄로 규정할 뿐이다. 그 아이가 받을 영향과 상실된 정상적 가정의 축복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준과 가치관을 돌아보아야 한다. 내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그리고 이웃에게서 무엇이 사라졌는지를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세상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처럼 보여도, 주님의 눈에는 잃어버린 것이 분명히 보인다. 날마다 이것을 확인하지 못할 때, 평생의 삶이 세상과 성경이 뒤섞여 뒤죽박죽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마땅히 부러워하고 좇아야 될 것은 뒷전인 채, 세상의 허무와 공허만을 좇아가게 될 것이다.
성경이 중요하다.
이러한 때에 성경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은 기준(Canon)이며 잣대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단순히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자신을 소개한 책이 아니다. 인간의 살아갈 길과 불행의 원인을 보여주며, 마침내 죄로 인한 인생 불행의 원인을 치유받고 영생 얻을 길을 가르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래서 성경은 인생의 당면한 불행을 이기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문이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성경의 가치를 모르는가? 세상에 좋은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생의 근본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부귀, 영화, 명예, 지식 등 좋은 것이 너무 많은 데, 굳이 고생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을 찾기 위해 애쓸 필요가 있는가? 성경을 몰라도 얼마든지 큰 소리치며 살 수 있는데, 왜 잘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할 필요가 있는가?
이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길을 찾지 못하고 산속에서 어둠이 찾아옴에도, 그저 가지고 있는 비상식량에 만족하고 좋다고 생각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비상식량이 떨어지는 그날에 망하는 것이다. 비상식량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길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조그만 식량 때문에, 자신이 가진 돈과 지식과 명예라는 것을 통해, 잠시 세상에서 힘을 쓸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만족한 웃음을 띠며, 어리석은 부자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다윗처럼, 말씀에 근거하여
다윗처럼 말씀에 마음을 확정하고 얹어두는 것이 중요하다. 다윗은 한결같은 신앙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다윗의 삶 그 자체는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목동으로 양을 치던 소년이 갑자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골리앗을 물리쳐 이스라엘의 영웅이 된다. 그 후에는 사울 왕을 위로하기 위해 수금을 연주하며 그의 심기를 경호하는 자리까지 오른다. 하지만 인생의 고난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사울 왕의 질투로 인해 다윗은 광야로 도망치며 생명을 위협받았다. 그는 “왜 나를 왕으로 세우셨습니까? 골리앗을 물리친 것도 부족했나요? 혼신의 힘으로 사울의 마음을 어루만진 것도 모자랐습니까?”라고 하나님께 묻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을 왕으로 기름부었던 사무엘도, 사울왕도, 심지어 하나님까지 원망할 만한 상황이었다. 사람에 대해 원망 잘 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결국 하나님 원망하는 자리에 이르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은 그 어떤 순간에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광야에서조차 하나님을 바라보며 신앙을 고백한다. 시편 57편을 보면 자신의 마음을 확정했다고 한다. 요동치는 마음을 바위같으신 하나님께 턱 하니 얹어두었다는 고백이다. 인생의 마음은 변덕이 죽 끓듯할 수 있어도, 하나님께 마음을 두게 될 때 요동치 않을 은혜가운데 머물게 된다. 그 요동치 않음의 근본이 무엇일까? 하나님의 헤세드, 자비와 사랑이다. 하나님의 헤세드를 생각할 때, 언제나 그의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셨고,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수 많은 억울함 속에서도, 위협 속에서도, 그는 한결같이 은혜가운데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붙들었다.
우리의 환경은 끊임없이 변한다. 환경은 신앙의 시험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환경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시며 한결같으시다. 다윗은 그분의 신실하심을 믿고 감사하며 찬송했다. 기준이 분명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매사에 하나님의 눈으로, 관점으로, 자신과 환경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강권적 은혜, 계속 순종
매일 매순간 선택의 순간을 맞이한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에 삭개오의 마음이 움직이고 반응했다. 택한 영혼에게 주시는 은혜의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굳이 욕하는 군중들 속에 갈 이유 없이 아주 편한 인생이었다. 그런데 그는 손과 발을 움직여 주님이 오신다는 길로 나아갔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키가 작은 것은 그저 작은 이유이고, 사람 근처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 다시한번 더 그 마음을 작정하는 일이 있었다. 나무위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이다. 강권적인 은혜라고 할 수 있다.
그러자 이제는 주님이 더 성큼 삭개오에게 다가오셨다. 삭개오의 집을 심방하시겠다는 것이다. 그 순간 그의 마음이 녹아내리고, 주님을 영접하여 모셔들인 후 그는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된 물질을 내려 놓았다.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이다. 창세전부터 택한 영혼에 대한 주님의 강권하시는 은혜의 액션이었다. 이에 대한, 거절할 수 없는 은혜의 순종이 그를 따랐고, 마침내 영혼의 참된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인생의 참 주인이 누구신가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일이었다.
말씀으로 성숙한 분별력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참된 영혼의 자유와 복을 상실한 인생을 살고 있다. 교회에 출석하고, 직분을 가진 이들 조차 그 삶이 헷갈리게 보인다. 무엇이 지혜이며, 무엇이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일까? 삭개오처럼 극적 반전을 이루는 것도 귀하지만, 좀 더 성숙한 자세를 원한다면, 우리는 삭개오처럼 행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다윗처럼 스스로 말씀과 기도가운데,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보고, 환경을 이기며 스스로 존귀한 인생의 자리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은 돈과 권력이 우리를 많이 헷갈리게 만든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선명하게 말씀과 기도가운데서 자신의 위치와 모습을 점검하고 돌아보며, 주님 외에 주인 행세하는 모든 것들을 물리치고, 다윗처럼 어떤 환경속에서도 주의 주되심을 노래하며 참된 자유와 은혜의 길로 행해야 될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12.07.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