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가주 청교도 이주 400주년 기념 책자 저자
남가주행복찬교회담임
8)왕정 복고(王政復古)와 청교도 운동의 종식
1658년 크롬웰이 죽자 그의 아들 리처드 크롬웰(Richard Cromwell)이 2대 호민관으로 추대된다. 그러나 그의 지도력이 아주 빈약하여 영국의 정치 상황은 다시 혼돈 가운데 빠지게 되고 왕정 복고운동이 일어났다. 왜냐하면 크롬웰이 의회를 해산하고 호국경(Lord Protector)이 되어 금욕적인 독재 정치를 실시함으로 당시 크롬웰의 정치권력은 사형을 당한 찰스 1세의 권력보다 더욱 강한 절대적 통치권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영국 국민들은 그의 지나친 금욕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예전의 상황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들은 좀 더 여유 있는 삶, 즐거운 오락이 존재하는 삶을 원했던 것이다.
만약 크롬웰이 청교도혁명으로 실권을 장악했을 때, 청교도들의 분열의 원인이 된 ‘독립파를 우대하고 장로교도를 억압하는 정책’을 펼치지 않고, 진정 화합과 성육신적 예수님의 삶을 실천했다면….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이 사망하자 “장로교를 영국국교로 삼겠다”는 감언이설(甘言利說)에 속은 장로교도들이 주축이 되어 1660년, 찰스 1세의 아들인 찰스 2세(Charles Ⅱ, 1660-1685)를 왕으로 옹립한다. 이런 잘못된 판단과 선택은 결국 청교도 교회개혁운동의 종말을 알리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찰스 2세는 부친 찰스 1세의 원한과 복수(?) 특히 청교도들에 대한 원한과 증오심에 불타 무자비한 박해와 공격을 시행한다. 그는 즉위 후 자신의 아버지 찰스 1세 처형에 서명한 판사들 중 살아있던 13명을 처형하고, 올리버 크롬웰의 무덤을 파 참수하는 부관참시를 시행하는 등 보복정치를 실시하였다.
‘1661년 1월 10일에 왕(찰스 2세)는 재세례파와 퀘이커(Quaker)교도들과 비국교도들의 모임을 금지하는 법령을 발포했다. 이때 약 4천명의 퀘이커교도들이 감옥에 갇혀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662년에는 종교통일정책을 대대적으로 실시하면서 추방령을 발포하여 비국교도들인 청교도들을 대거 추방했다. 추방령의 골자는 ‘성공회 예식에 따라 목사가 되지 않은 사람은 다시 안수를 받고 목회에 임하든지 교회를 떠나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강력한 성공회 정책에 의하여, 2천4명의 청교도 목사들이 영국 교회에서 제명당한 후 목사관과 교회로부터 강제 추방을 당했다. 또한 추방된 목사는 전임지로부터 5마일 밖으로 출입할 수 없다는 ‘5마일령’(5Mile Act)을 내려 목사의 주거를 제한하였고 설교권까지 박탈하였다. 심지어 1670년에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비밀 협정을 맺고 로마카톨릭교회를 영국에 복원하려 했다. 그 당시 활동한 대표적 청교도로는 존 번연(John Bunyan), 존 오웬, 리처드 백스터, 토마스 멘튼(Thomas Manton) 등이 있었지만 이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청교도 운동은 하강기로 접어든다.
이와 같이 영국 국교회 내에서의 청교도운동, 즉 청교도 종교개혁은 1534년 헨리 8세로부터 시작하여 피의 여왕 메리의 박해, 엘리자베스 중용정책,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의 박해, 그러나 청교도 운동은 크롬웰의 청교도 혁명을 통해 정치적 주도권까지 쥐며 황금기의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전술한 대로 1660년 찰스 2세의 왕정복고로부터 사실상 청교도 운동은 종식된다.
그 이후 1685년 찰스 2세 사망 후 즉위한 제임스 2세(James 2, 1685-1688)가 영국 교회를 로마카톨릭교회로 환원하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1688년 백성과 왕의 지원군이었던 토리(Tories)당이 종교정책에 반발하여 외면하였고, 명예혁명(名譽革命, Glorious Revolution)으로 제임스 2세는 폐위된다.
이어 윌리엄 3세(William of Orange 3)가 즉위하여 1689년 소극적 의미의 종교자유령인 “용인법”(Act of Toleration, 관용법)이 의회에서 제정 공포되어 삼위일체교리를 부정하는 단일신론자와 로마카톨릭교도를 제외한 모든 자에게 종교의 자유, 즉 종교다원화(Religious Diversification)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그럼 왜! 청교도 운동이 1662년 이후 급속히 영국에서 종식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스코틀랜드 스튜어드 가문(House of Stuart) 출신 영국 왕 제임스 1세와 아들 찰스 1세, 그리고 손자인 찰스 2세 등 3대에 의한 적극적 반 청교도정책 때문이었다. 즉 정치적으로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을 신봉한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 특히 청교도들에 대한 극도의 혐오와 청교도 혁명으로 죽은 부친 찰스 1세에 대한 복수(?) 차원에서 찰스 2세는 사생결단의 자세로 청교도들을 향한 전방위 공적 핍박과 무자비한 탄압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찰스 2세는 비국교도들에 대해 공직과 대학에서 추방 및 진입 차단으로 원천 봉쇄를 했다. 이것이 청교도 사역의 지속적인 영향을 발휘하지 못한 큰 원인이 된다.
또 하나의 원인을 들자면 엘리자베스 1세 때부터 유지되어온 청교도들의 연합이 더는 존속되지 못한 것을 들 수 있다. 이후 청교도들은 사분오열 되다시피 했으며 그렇게 결속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잉글랜드교회를 개혁하자는 소리가 하나로 집약될 수 없었다. 마틴 로이드 존스(D. M. Lloyd-Jones)는 하나 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으로 신앙의 자유를 부르짖으면서 그 자유가 장로정치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은 고집스러운 장로교도들을 꼽았다. 그러나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수장권을 양보할 수 없었던 언약도들(Covenanters)은 왕이 ‘교회의 수장’(Supreme Head)이라는 비성경적 영국 국교회(성공회)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장로정치가 필요했기에 이를 철회 할 수 없었다고 필자는 본다.
결국 스코틀랜드는 장로교 국가로 남았고, 잉글랜드는 개혁하지 못한 채 성공회 국가로 남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청교도 신앙과 사상은 지금까지 살아있지만 성공회 국가교회 개혁을 추구했던 그들의 개혁운동은 결국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영국의 종교개혁은 교황제와 극단주의 사이의 ‘중용의 길’(via media)을 걸었다”고 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교회가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단절은 그 당시 절대 권력과 권세의 로마 카톨릭교회와 교황청에 대한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을 유럽에서 점화 확대 증폭되는 나비효과(Butterfly effect, 조그마한 시작의 차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알 수 없는 커다란 결과로 이어지는 역학계의 혼돈 이론 원칙)의 시대 상황을 맞게 했다.
이와 같이 청교도 운동은 1세기반 동안 영국에서 진행된 개신교 종교개혁 운동이었고, 17세기 미국으로 이주한 영국의 청교도들의 신앙과 사상 그리고 삶의 모판을 형성하여 하나님 절대주권의 알찬 열매가 된다.
[필자주] 1장, 청교도 개혁 운동의 기원(Era)과 배경(Background)의 저술에 서창원(청교도신학과 신앙), 오덕교(청교도 이야기), 배한극(미국 청교도의 사상의 기원과 변천), 알렌 카든(청교도정신), 곤잘레스(종교개혁사), 김승진(종교개혁자들과 개혁의 현장들), 제프리 행크스(교회사를 빛낸 거인들), James Heron(청교도 역사), Lewis Spitz(종교개혁사) 외 다수의 책을 참조했다.
kimjoyh@gmail.com
06.06.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