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가주 청교도 이주 400주년 기념 책자 저자
남가주행복찬교회담임
5)제임스 1세 시대의 교회개혁 좌절(挫折, Frustration)
스코틀랜드에서 칼빈주의 교리들의 배경 하에 자란 제임스 6세가 제임스 1세(James Ⅰ, 1603-1625)라는 칭호로 영국 왕위에 오르게 되어 청교도들에게 교회개혁의 큰 기대와 희망을 주었다. 왜냐하면 영국 국왕이 된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서 이미 존 낙스에 의하여 1560년에 장로교를 국교로 삼음으로써 종교개혁이 완성된 장로교 나라의 왕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제임스 1세는 카트라이트가 옥중에 있을 때에 그의 석방을 위해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편지를 쓸 정도로 청교도들에게 우호적이기 때문이다. 신학에 있어서도 칼비니스트로 알려졌으며 1581년 청교도의 입장을 지지하는 소극적 고백(The Negative Confession)에 서명하였다(배한극, 미국 청교도의 사상의 기원과 변천, p.67). 영국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1,000여 명의 청교도들은 교황의 누더기라고 불리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잔재를 제거하는 개혁을 이룰 것을 청원하는 ‘1천인의 청원’(Millenary Petition)을 제임스 1세에게 제출한다.
그러나 청교도들의 기대와는 달리 제임스 6세(제임스 1세)는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감독주의 제도를 선호했다. 그는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을 신봉하는 왕이었기 때문에 왕이 교회의 수장이라는 신조를 가진 성공회 감독정치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1620년에 종교와 시민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떠난 청교도들이 오늘날의 미국을 건설하게 된 모체가 되었다(서창원, 청교도 신학과 신앙, p.36). 그 청원서에 의해 1604년에 제임스 1세가 햄턴 코트(Hampton Court)에서 회의를 개최한다. 그는 성직자의 이중직을 폐지할 것과 목사의 학적수준을 높이는 문제, 그리고 공동기도서와 요리문답서를 개정하는 것에 대하여는 동의했지만 교회정치 개혁에는 반대했다.
제임스 1세는 흠정역성경 발간 후원했으나 감독주의제도 선호
찰스 처형한 크롬웰은 집권 후 더 나쁜 ‘군사독재’ 평가 받아
그 이유는 전술한 바와 같이 왕의 지배를 인정하는 감독주의가 공화정을 주장하는 장로주의로 대체된다면 왕권도 사라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제임스 1세는 장로파의 성직주의에 대해 개인적인 경험을 상기하면서 “주교 없이는 왕도 없다”(no bishop, no king)는 유명한 한 마디를 함으로써 자기의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그는 장로교인들과 청교도들에 대한 그의 반감은 그의 통치 내내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그들로 하여금 내 말에 따르게 할 것이다. 만일 내 말을 듣지 않으면 그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든가 그보다 더 나쁜 일을 행할 것이다”(제프리 헹거스, 교회사를 빛낸 거인들, p.191)고 위협을 가하며 영국성공회에 순응할 것과 자신을 교회의 머리로 인정하는 선언문을 발표한다. 그러나 약 2천명의 성직자들은 이를 거절한다. 그 중 3백여명 가량은 성직을 떠났고 나머지는 감옥에 투옥된다. 1604년, 윗시프트가 죽은 후 대주교에 임명된 리처드 뱅크로프트(Richard Bancroft)는 햄튼의 결정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고등 종교법원을 열어 청교도에 대한 박해를 강화했고(오덕교, 청교도 이야기, p.22), 더 나아가 카톨릭교회의 장식과 의식을 다시 사용하도록 환원시켰다.
이렇게 영국교회 안에서 개혁이 실패로 돌아가자 고민하던 소수의 분리주의 청교도들인 잉글랜드의 스크루비(Scrooby) 출신들이 1607년에 신앙의 자유를 찾아 네덜란드로 망명한다. 제임스 1세는 청교도들을 대적하는 오락포고령(Declaration of sports, 1618년) 등 일련의 법령들을 발포하면서 참된 교회를 세우려는 청교도들을 몰아내고자 힘을 쏟았다(서창원, 청교도 신학과 신앙, p.36). 즉, 양궁을 비롯한 일부 종목의 스포츠 활동은 주일에도 허용할 수 있다고 발표하였다. 이것은 제임스 1세와 청교도 진영 사이에 갈등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제임스 1세의 아들인 찰스 1세가 1633년에 ‘스포츠 선언’을 재천명하기도 하였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일요일에 허용할 수 있는 오락을 다룬 제임스의 오락서(Books of Sports)를 예배 시 강단에서 의무적으로 읽도록 한 것이 주일 성수할 것을 주장하는 청교도들에게는 심한 모욕이요 절대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레이든(Leiden)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초대교회의 생활과 가까운 삶을 산다. 그러나 네덜란드 생활은 비참했다. 영국에서 잠시 돌아왔으나 제임스 1세의 폭정이 점점 더 심해지자 진정한 신앙의 자유를 위해 신대륙으로 떠날 계획을 세운다. 마침내 그들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케이프 코트(Cape Cod Bay)만의 연안에 도착하여 플리머스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들이 소위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이다(배한극, 미국 청교도의 사상의 기원과 변천, p.68).
제임스 1세의 종교사적 큰 공적은 1611년의 흠정역(Authorized Version) 성경 발간을 후원한 것이다. 영국인들의 민족주의 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일환으로 왕실 주도로 성경을 영어로 번역케 한다. 그것이 영어권에서 가장 많이 출판되고 사용되었다고 하는 킹제임스성경(King James Version Bible, Authorized Version)이다(Baker, A Summary of Christian History, p.251).
6)찰스 1세와 크롬웰(Oliver Cromwell)의 청교도 혁명(Puritan Revolution)
1625년 제임스의 아들 찰스 1세(Charles 1, 1625-1649)가 왕위에 오르자 청교도들은 더욱 심한 핍박을 받게 된다. 찰스 1세는 로마 카톨릭교도인 프랑스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영국 의회 사이에 쐐기를 박는다.
찰스 1세는 월리엄 로우드(William Loud)를 켄터베리 대주교에 임명, 대대적인 청교도 탄압을 전개한다. 로우드는 알미니우스주의(Arminianism)자로 구원 사역에서 인간의 능력이 중요함을 역설하였고 왕권과 주교직의 신적인 기원을 주장하고 성찬 중심의 예배를 강조하는 등, 성공회 정책을 폈으며 의식적인 예배를 추구했다. 찰스 1세에 의하여 고교회(High Church) 경향의 예배가 시작되었고 이런 고교회 정책으로 영국교회는 로마카톨릭교회와 거의 다름이 없게 된다.
이러한 반 종교개혁운동에 대하여 청교도들이 반발하자 로우드는 그들을 고등 종교법원에 소환하여 청교도 신앙을 포기하는 자는 살려주었지만, 고집하는 자들은 혹독하게 박해하였다. 심문과 박해를 하기 위해 악명 높은 성실청(Star Chamber)이라는 법정을 사용하였다. 선동적인 중상자(中傷者, Seditious Libeller)라는 말에 머리글자인 S. L, 또는 선동자(煽動者 Sower of Sedition)라는 말의 머리글자인 S. S 등의 문자를 불에 달군 인두로 청교도의 얼굴에 새겼고, 귀를 베거나 처형하였다(오덕교, 청교도이야기, p.25).
청교도들은 영국 교회를 개혁할 수도, 영국에 남아 있을 수도 없는 큰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결국 이 같은 엄청난 박해와 신앙의 자유를 위해 1629년과 1640년 사이에 약 2만여 명의 청교도들이 미국의 뉴잉글랜드로 떠났다(Erroll Hulse, 청교도들은 누구인가, pp.62-63). 1628년, 존 윈스럽(John Winthrop)을 중심으로 신대륙으로의 이민을 계획하였고 1630년에 이민을 시작하여 매사추세츠를 중심으로 언덕 위에 도시를 세웠다. 이 뒤를 따라 뉴잉글랜드의 영적 기초를 놓은 존 코튼(John Cotton)과 토마스 셰퍼드(Thomas Shepard), 코네티컷을 건설한 토마스 후커, 인디언의 사도라 불리는 존 엘리엇(John Eliot) 등 많은 청교도들이 이민을 하면서 신대륙은 청교도의 중심지가 되었다(오덕교, 청교도이야기, pp.25-26).
찰스1세는 1637년 고향인 스코틀랜드 국교인 장로교를 없애고 감독교회를 세우고자 했다. 그래서 그 당시 켄터베리 대주교인 로우드(Loud)에게 공동기도예식서를 작성하게 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수도인 에딘버러(Edinburgh)에 있는 성 자일스(St. Giles)에서 감독식 예배를 강행했다. 이로 말미암아 강력한 폭동이 일어났다. 이 반기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서창원, 청교도 신학과 신앙, p.37).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와 전쟁하기 위하여 1629년에 해산한 의회를 1640년에 재소집한다. 그런데 왕을 반대하는 청교도들이 의회 과반수이상을 차지하자, 또 다시 의회를 해산하고, 의회 지도자들을 체포하려 했다. 이에 반발한 의회파와 왕을 지지하는 왕당파 사이에 발생한 7년간의 내란(1642-1649년)이 발생한다. 즉, 청교도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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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0.2020